갑자기 자신이 지목되자 화들짝 놀란 백영석이 벌떡 일어났다.
“그건 그냥... 홍보팀 직원이 뭣 모르고 찍은 건데...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됩니다.”
“왜 놓쳤냐고 묻는 거잖아!!”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치는 남궁 대표! 그는 회의실의 직원들을 차가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첫째도 흥행, 둘째도 흥행이야! 예술은 그 다음이라고. 흥행에 도움이 된다면 예술이니 뭐니 다 끌어다 붙이고.”
남궁 대표가 또다시 백영석에게 질문했다.
“<자객> 이병우 스캔들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발 빼야 하는 거 아냐?”
“아시아 시장까지 먹을 기횐데 솔직히 놓치기 아깝습니다. 메인 투자에서 부분 투자로 바꾸는 거면 몰라도.”
“흠... 건 좀 더 고민해 보고... <더 키친> 캐스팅은 되고 있어?”
“영화사에서 성수정, 염소희로 가면 어떠냐고 콜이 왔는데...”
표정이 밝지 않은 백영석과 달리 직원들은 성수정? 염소희? 하며 수군거린다. 남궁 대표의 얼굴에 보일락 말락 한 미소가 떠오르는데.
“생각지도 못했는데... 노출 있는 영화 주인공으로 무게감 있는 여배우라...”
“요즘 관객들이 성수정의 노출 연기를 보고 싶어 할까요? 예쁘고 핫한 여배우라면 몰라도.”
캐스팅에 회의적인 백영석.
“홍감독 단편 보면 비주얼리스트 보단 주제 의식 있는 영화 좋아하는 것 같던데, 웰메이드 영화가 나올 수도 있어.”
“감독도 신인인데, 한물가서 사극 드라마 찍고 있는 여배우를 쓴다고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는 백영석의 우려에 묵묵히 있던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장대표가 능력 있으니까 감독 컨트롤 잘할 거야. 영화 예산이 높지 않아서 리스크도 적고.”
백영석은 반대하고 싶지만 본부장까지 나서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표가 괜찮다고 했으니 책임지겠지. 난 반대의견을 충분히 어필했으니까 영화가 안 되면 면피할 명분이 생겼고.’
회의가 끝난 후 백영석은 셔츠의 윗단추를 풀며 한숨을 쉬었다. 본부장이 눈에 보이자 다가가
“<더 키친> 진짜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라고 물었다. 본부장을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이 감독 출신이라 그런지 감독 재능 하난 잘 보시더라고. 게다가 장대표랑 성수정이 베테랑이잖아. 괜찮은 조합 아냐? 전체를 볼 줄 알아야지.”
능구렁이 같은 인간, 남궁 대표가 찬성하는 것 같으니까 편든 거면서, 라고 백영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
안주연의 멜러 영화 시사회가 연일 성황리에 벌어지고 있었다.
‘멜러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쓰다;, ‘세련되고 절제된 영상미’ 같은 좋은 반응이 신문 기사에 연일 떴고, 일반인들도 다음, 네이트 같은 사이트에 반응을 올렸다.
- 영화를 본 후 자다가 생각나 밤잠을 설쳤다
- 한번 봐선 안 된다, 두 번 세 번 봐야 한다
- 담담해서 더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시사회에 찾아오는 VIP들까지 챙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배우, 스텝들의 티켓을 챙기고, 일반인들의 시사회 반응도 체크한 후 관련 기사를 언론에 뿌렸다.
문제는 안주연이 지인들과 참석하기로 한 극장 시사회 날 벌어졌다.
얼른 퇴근할 생각밖에 없는 막내가 연일 야근하더니 몸이 안 좋아져서 내게 시사회를 부탁한 후 먼저 가버렸다. 시사회 막판이라 피곤하긴 나도 마찬가진데!
막내가 담당하기로 했던 마지막 시사회 날이라 안주연의 몫으로 시사회표 5장을 빼놓으면 된다고 해서 준비했는데, 안주연 매니저가 오더니 무려 15장을 달라는 게 아닌가.
시사회 표가 매진이라 여유분이라곤 없었다. 급히 막내 직원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약을 먹고 잠들어 버린 건지 도대체 연락이 닿질 않았다.
조급해진 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남는 표가 없는지 체크했지만 소용없었다. 시사회 시간은 다가오는데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15장이라고 말했다니까요! 오늘 주연씨, 존경하는 선배 연기자님까지 모시고 온댔는데 바닥에 앉아서 보라고 하냐고!”
매니저가 화가 나서 말했다. 막내가 실수한 건지, 매니저가 잘못 말했던 건지 진위 여부를 따져봤자 소용없었다. 안주연이 곧 들이닥칠 테니까.
뒤에서 여자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지만 정신이 나가서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정지우가 모자를 쓰고 나타났는데 한번에 알아본 여자들이 내지른 함성 소리였다.
이때 정지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반가운 듯 내게 손들어 인사했지만 고개만 까딱한 후 정신없이 뛰어갔다. 머릿속에 안주연의 표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입장하기 시작해 인파가 점점 늘어나자 정신이 아예 나갈 지경이었는데.
이리저리 뛰어다닌 끝에 겨우 5장의 표를 구했지만 아직도 5장이 모자랐다. 안주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그녀의 미모는 왜 이렇게 눈부신 건지. 핏줄이 비쳐 보일 만큼 희고 깨끗한 피부에 현실감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작은 얼굴을 보니 마치 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렇게 작은 얼굴 안에 눈 코 입이 다 들어있구나. 감탄하는 것도 잠시, 불만에 가득 찬 매니저의 얘기를 듣는 안주연을 보는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전달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나 봐요. 5장이 모자라는데 어떡하죠?”
“다섯 명은 서서 보란 얘긴가요?”
안주연은 싸늘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
안주연을 알아본 관객들이 다가와 우리 둘을 궁금한 눈길로 쳐다보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남들의 주목을 끄는 일은 딱 질색이다. 어떻게든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간절해졌다.
“죄송합니다...”
내 잘못도 아닌데 내 또래의 여배우에게 고개를 푹 숙여야만 하는 입장이 너무 비참했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시사회 티켓을 불쑥 내밀더니
“여기, 취소된 표 가져가라니깐.”
라고 말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정지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