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이네요. 평소에 존경했던 배우신데 작품에서 몸 사릴 줄은 몰랐습니다.”
“뭐야?”
“장감독! 거 참 말 좀 살살해. 하하하, 이 친구가 평소엔 안 이런 데...”
홍감독을 잔뜩 노려보던 성수정이 입을 열었다.
“그야 젊고 예쁠 때 얘기지. 내 나이가 몇인 줄 알아?”
“지금도 젋고 예쁘십니다!”
칼같이 답하는 홍감독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성수정.
“호호호, 아하하하.....”
그런 성수정을 놀라 쳐다보는 장대표와 홍감독. 그녀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데.
“어우, 그런 얘기를 뭘 그렇게 진지하게 해?”
순식간에 기분이 풀린 듯한 그녀를 보며 장대표가 잠시 안도한다.
“선배님, 이 영화로 또 한번 국제 영화제 보내드리겠습니다. 저 자신 있어요.”
홍감독의 자신감에 놀라 쳐다보는 장대표. 성수정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하이힐 신은 발을 빙빙 돌리며 흥미로운 듯 홍감독을 바라봤다.
“이 친구가 찍은 단편 영화도 해외에서 많이 수상했어요. 재능은 제가 보장합니다.”
“흥, 오랜만에 재밌네... 귀엽게 생겨 갖고.”
홍감독은 자기 머리 위에서 노는 듯한 여배우를 상대하느라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지만 기 싸움에서 절대 지면 안 된다는 걸 느꼈다.
“그래요, 가봅시다! 노출 수위는 다시 얘기해 보고. 좋죠, 감독님?”
갑자기 애교 있게 말하는 그녀를 보는 순간 홍감독은 속으로 ‘됐다!’ 하고 환호했다.
“역시 화끈하시다니까! 홍감독, 복 받은 줄 알아, 기고 아니고가 확실한 분이니까.”
“왜 이래, 나도 다 알아보고 온 거야. 시나리오만 좋으면 뭘 해, 감독이 똑똑해야지.”
성수정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명 ‘가방 모찌’와 함께 사라지고 나서야 장감독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우우....”
“제법인데? 신인 감독이 감히 대배우한테 들이대? 으하하하...”
통쾌한 듯 웃는 장대표.
“그런데 어떻게 성수정을 캐스팅 할 생각 했어?”
“진미래씨가 말했는데, 느낌이 딱 오더라고요.”
그래? 의외라는 듯 생각하는 장대표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졌다.
‘’시네마펀치‘에서 무슨 말을 할지 걱정이구만...“
*
이른 아침부터 남궁 대표와의 회의를 기다리는 직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넓고 긴 테이블을 마주 보고 앉은 직원들, 특히 백팀장은 어두운 안색으로 테이블의 커피만 마셔댔다. 중요한 회의가 기다리고 있는지 넥타이에 넥타이핀까지 꽂은 남궁 대표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자 다들 벌떡 일어났다.
손으로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한 남궁 대표는 자리에 앉다가 자신의 커피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뜨거운 커피 갖다 놨어!”
맨 앞자리에 앉아있는 직원이 당황해 벌떡 일어났다. 커피를 가져가 회의실의 문을 열고 회사 입구 데스크에 앉은 여직원을 손짓해 불렀다. 빠르게 뛰어온 여직원이 얼음 가득한 검은 색 커피를 갖다주고서야 회의가 시작되었는데.
“배급팀! 대구, 부산 쪽 프린트 수급 문제 해결됐나?”
“네! 어젯밤에 확인했습니다. 멀티플렉스들이 대기업 소유다 보니까 지네들 영화만 걸려고 해서... 한번 내려가서 단도리 쳐야될 것 같습니다. 자꾸 이러면 우리 영화 빼버린다고.”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남궁 대표.
“지금까진 흥행 영화만 공급해서 버티지만... 우리도 멀티플렉스 사업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본부장도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돈이 한두 푼 드는 것도 아닌데, 대기업하고 경쟁했다가 물량 공세에서 지는 순간 다 끝입니다. 예전에도 사업 검토했지만 취소하지 않았습니까?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흥행할 수야 있다면 문제 없겠지만... 그게 가능하냔 말이지.”
깊은 고민에 빠진 남궁 대표 앞에 아무 말 못하는 직원들.
“아메리칸 필름 마켓에서 사 온 외화들 성적은?”
남궁 대표가 묻자 해외 세일즈 팀장이 긴장한 얼굴로 답했다.
“똔똔 정도입니다. 손해 본 것도 없지만 크게 번 것도 없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해외 세일즈 팀을 보는 남궁 대표가 뭔가 떠오른 듯 질문했다.
“그 제목이... ‘시크릿...룸’ 이던가? 그건 어떻게 됐어?”
해외 세일즈 팀장의 낯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는데.
“우리가 안 사기로 해서 다른 회사가 개봉... 했습니다.”
“그래서... 스코어는?”
서로 눈치 보는 분위기가 되자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28만 정도 됐습니다. 아시아에선 우리가 최고 스코어를 기록했고.”
남궁 대표의 얼굴이 놀라움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내 기억에 초저예산 미국 영화였는데? 그 말은 북미, 유럽까지 포함하면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는 거 아냐!”
직원들의 표정이 긴장감으로 물들어 싸늘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는데.
“어떤 영화사 홍보팀 직원도 흥행할 거라 말한 작품을 놓쳤다... 어떻게 생각하나, 백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