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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국봄 Aug 05. 2019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으며

2013년은 나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해다.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직업이 바뀌었고, 삶의 터전이 집에서 기숙사로 바뀌었다. 그 외에도 큰 변화들이 있었다.


기숙사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차를 타지 않으면 출퇴근이 불가능한 거리였다. 나에게는 셔틀버스라는 해결책이 있었으나, 운이 좋았는지 기숙사 안에 같은 팀의 선배의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그때 그 선배의 차에서 우연히 보게 된 책이 바로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다. 한참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빠져서 이 책 저 책을 찾아 읽던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을 마주치니 반가웠다. 흰색 배경에 몇 개의 알록달록한 선이 그어져 있는 책의 표지와 제목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꼭 읽어봐야지 하고 6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6년이라는 시간 사이에 두 곳의 직장을 거쳐 지나갔다. 나는 변함없이 출근했고 퇴근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술을 잘 먹지 않는 편인데 이날은 유난히 술이 먹고 싶은 날이었다. 퇴근한 내 발걸음은 집이 아닌 집 근처에 새로 생긴 Bar로 향했다. 메뉴판을 유심히 살핀 뒤 포트 와인 한 잔과 간단한 안주 하나를 시켰다. 주문한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다음 날 업무를 위해 자료를 살펴봤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이것저것 끄적거리는 중에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달콤 쌉싸름한 와인과 짭짤한 안주를 한 입 삼키니 약간의 취기가 올라왔다.


육체적인 피로감과 정신적인 피로감에 조금의 취기가 더해지니 노곤노곤해지고 마음 편히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놓여있던 서류들을 접어 가방에 넣고 Bar에 놓인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이게 무슨 우연일까. 내 손에 잡힌 책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였다. 뭔가에 홀린 듯 책을 펼쳐 들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술을 한 잔 더 시킨 뒤 책을 읽어 내려가다 시계가 어느새 10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책을 덮었다. 이 책은 꼭 읽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2~3개월이 지나고 회사에 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좋았던 것 중의 하나는 동네 도서관에 마음껏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난 Bar에서 읽은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도입부를 잊지 못하고 있었고 책을 빌리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쓰쿠루와 한 사람이 된 것처럼 우울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땅을 밟고 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밑바닥으로 끝없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하루키의 마법에 홀려 책으로 들어갔다가 나의 연인의 명랑한 음성을 듣고 나서야 땅을 밟고 있다는 현실감이 느껴졌다.


하루키의 책은 도입부에서부터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주는 마술서와 같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머릿속에 수많은 그림을 그려내게 만든다. 하루키의 적절한 비유 때문인지, 세밀한 묘사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루키의 묘사 중에 가장 좋아하는 묘사는 다림질을 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세탁을 하고 차분하게 앉아 셔츠를 다리는 장면은 유난히 또렷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구김이 있던 천이 달구어진 쇠에 맞닿아 펴지면서 나는 냄새와 열기, 치이익 하면서 물이 증발하는 소리가 느껴진다. 아마도 유난히 복장 규정이 엄했던 첫 직장 때문에 혼자 다림질을 했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6년을 거쳐 읽게 된 하루키의 책은 6년 전의 나를 추억하게 만드는 나만의 일기장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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