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에 식탁이 있는 집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안방에도 식탁이 있는 집이 있었다. 고기를 굽는 날이면 항상 안방에 있는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인데 그때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조그마한 원형 식탁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었다. 원형 식탁의 묘한 점은 사각 식탁과는 달리 서로의 공간을 구분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원의 크기가 작을수록 더 심해지는데 그때는 불편한지도 모르고 서로 살을 부딪치면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식탁 가운데에 버너와 불판이 올라오면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된다. 뜨겁게 달궈진 불판에 고기가 올라가면서 치이익 소리를 낸다. 음식이 맛있게 익어가는 소리는 비가 땅에 맞닿는 소리와 같다던데 안방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었다고 생각하니 운치 있는 식사였다는 생각도 든다.
고기를 구워서 밥 한 공기를 싹 비울 때쯤이면 불판 위에 포일이 깔리고 김치와 잘게 잘린 삼겹살이 밥과 함께 볶아진다. 돼지기름으로 밥을 볶았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가끔 식탁 위로 올라오는 초록 병의 눈부심이 인상을 찌푸리게 했던 것을 빼고는 안방에서의 식사는 즐거웠었다.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나의 식탁의 풍경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제는 더는 안방에 식탁이 있지도 않고, 가족들이 다 모여서 식사하는 일도 흔치 않다. 가정주부에서 직장인이 된 어머니, 자취하러 집을 나간 형, 직장생활과 학교생활을 겸하는 나. 네 가족이 살을 부딪치면서 식사를 하던 때는 이제 추억으로 남고 식탁 앞에 혼자 있는 일이 더 많아졌다. 일을 쉬고 있는 지금은 어머니와 식사를 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내가 주로 식사하는 공간은 노트북이 놓여 있는 책상이다.
식탁의 풍경이 변해가면서 동시에 집밥의 의미도 변해갔다. 어릴 적 나에게 집밥이 일상적인 식사를 의미했다면, 지금의 나에게 집밥은 비일상적인 식사,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식사가 됐다. ‘집밥’은 단순히 집에서 먹는 밥이 아니다. 식탁 위에 반찬이 가득히 올라와 있다고 해도 ‘집밥’은 아니다. 밥그릇에 사랑을 소복이, 국그릇에 배려를 한가득, 접시에 정성 한 움큼 올려진 식탁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대화를 나누는 식사가 ‘집밥’이다.
빠르게 변해 온 나의 삶은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식탁에서 차가운 모니터를 홀로 마주하는 식탁까지 이끌었다. 즉석조리식품, 편의점 도시락 등 홀로 밥을 먹는 이들을 위한 상품들이 줄지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런 변화도 자연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집밥’을 그리워하며 차가운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멈춰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검색창에 낯선 검색어를 써본다. ‘김치찌개 레시피’. 냉장고를 열고 김치를 꺼내 서툰 칼질을 하고 누군가를 위해 식탁을 따뜻하게 덮인다. 아직은 조금 어렵고 서툴지만 끙끙대며 식탁을 안방으로 다시 옮기는 일보다는 수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