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블렛이 끝나는 기간에 맞추어 집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져갈수록 자주 악몽을 꾸었다. 누군가에게 이유도 모르게 쫓겨 도망치는 꿈,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자꾸 어딘가 열려있거나 문이 잠기지 않거나 사람들이 쳐다봐서 답답한 꿈. 시간여유가 있다고, 조급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갑자기 집이 구해지는 것도 아니니까 느긋함을 유지하고 싶었다. 안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은 그러세요 냅두고 집을 구할 거라고 믿으려고 노력했다.
플랜 B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파트너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꾹꾹 누르고 있는 불안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닌 일들도 그 한가운데에 있을 땐 눈앞이 캄캄해 마냥 두렵게 느껴진다. 그래도 된다고 믿으면, 될 때까지 하면 된다. 파트너랑 번갈아가며 약해진 상대를 토닥이고 달래며 막연한 불안의 시간을 함께 통과했다.
하루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공원에서 놀고 온 파트너가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월세가 비싸도 일단 계약을 해서 살다가 나중에 소송으로 월세를 깎으면 된다는 조언을 해주었단다. 그 둘도 이미 집주인에게 소송을 걸어 그동안 바가지로 낸 월세와 보증금의 부분을 돌려받았으며, 지금은 이전의 거의 반값정도만 월세를 낸다고. 소송을 조언해 준 친구 중 하나는 심지어 서블렛인데도 소송했고, 방 하나에 800유로를 내다가 이제는 방 2개인 플랏 전체를 혼자 쓰면서 800유로를 낸다. 서블렛도 소송이 가능하다니...!
베를린에는 단기간 머물고 떠나는 외국인들이 많고, 이 사실을 모르거나 귀찮아하는 독일인들은 그냥 바가지금액을 내고 살다 나가기 때문에 많이들 바가지를 씌우고 소송당하고, 다음 세입자에게 또 바가지를 씌운다. 우리 서블렛 원 세입자도, 위층 이웃도 집주인을 소송했고, 월세를 낮췄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자꾸 유튜브에 나오던 <베를린에서 월세를 너무 많이 내고 사나요? 우리가 도와줄게, 월세 덜 내세요> 광고가 떠올랐다.
알아보니 베를린은 오래된 건물에 적정 월세가격을 정해둔다. 그리고 그 가격보다 높은 금액을 내는 경우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하면 대부분 적정가격으로 낮추는 게 가능하다. 그러면 그동안 너무 많이 낸 월세와 보증금의 부분을 전부 돌려받고, 다음부터는 적정 월세를 내면 되는 것이다. 살면서 소송이라는 걸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게 가능하다는 사실에 한번 놀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한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주변에 물어보면 직접 소송을 했거나 소송해서 월세를 내린 사람을 알고 있다. 그만큼 흔한 일이었다. 베를린 오래된 플랏 적정가격을 볼 수 있는 페이지를 찾아서 집 구하기 앱에 올라오는 플랏 공고를 보고 검색해 봤다. 주소를 입력하고 건축연도와 평수를 입력하면 최저 <평균 <최대 금액이 나온다. 평균금액을 클릭하면 상세 현재 상태를 체크해 살고 있는 집의 정확한 금액을 알 수 있다.
베를린 적정월세 체크 페이지
https://www.stadtentwicklung.berlin.de/wohnen/mietspiegel/index.shtml
적정가격으로 계약을 하는 집주인과 주택관리 회사들도 있지만 집 구하기 앱을 둘러본 결과 그 수가 적고, 공정한 가격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소송을 걸고 금액을 돌려받기까지 몇 개월의 시간이 걸리므로 감당할 수 없는 만큼 비싼 계약서에 서명하는 건 위험하다. 대부분은 세입자가 승소하는듯한데 집주인이 본인 혹은 가족이 살아야 하니 그 집에서 나가라고 하면 쫓겨날 가능성도 있다. 물론 여긴 독일이므로 집주인 역시 정당하게 사실을 증명해야 하므로 아주 쉬운 일은 아니다. 오래된 집이어도 단열이 잘 되는 새 창문으로 바꾸는 등의 세입자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수리를 했다면 월세를 좀 더 받아도 되고, 가구를 들여놓고 세를 주는 꼼수를 부리면 세입자에게 불리할 수도 있고 뭐 그런 것들이 있어 변호사랑 얘기해서 잘 알아보고 소송을 하는 것이 현명하겠다.
소송을 걸고 싸워야 정당한 금액을 낼 수 있는 상황이 빡치면서도 소송을 하면 정당한 금액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심지어 독일에는 온갖 종류의 보험이 있어서 세입자보험에 들면 변호사 선임비 걱정도 안 해도 된다. 유튜브 광고에 나온 회사는 3개월 치 바가지 썼던 금액을 내면 그동안 바가지 썼던 모든 금액을 돌려받고 새로 내는 월세를 정상금액으로 바꾸게 도와준다. 독일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시스템을 이뤄낸 걸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