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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Feb 02. 2019

본에서 만난 베토벤과 슈만

27일: 독일 본, 쾰른

이틀 밤을 머문 소도시 랑엔펠트는 뒤셀도르프와 쾰른의 중간에 있다. 남쪽으로 차를 몰면 30분도 안돼 쾰른이 나온다. 쾰른 지나 30분쯤 더 내려가면 본이 있다. 통일 전 서독의 수도였던 그 본이다. 어린 시절 나라별 수도 맞추기에서 늘 헷갈렸던 "독일의 수도는 베를린이 아니고 본"의 그 도시다. 통일 후에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기면서 본은 낯선 이름이 되었다. 큰 도시는 아니지만 역사는 오래된 도시다. 수도 이전 후에도 몇몇 정부부처는 본에 남았다. 주요 기관 브랜치들도 남아있어서 제2의 비공식적 행정수도 역할을 하고 있단다. 수도 베를린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으니 보완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서독 시절 자리 잡은 국제기구들의 지역본부도 꽤 있어서 정치적 중요성이 남아있는 도시다.


정치적 거점이라고만 생각했지, 볼거리가 많을 줄은 몰랐다. 꼭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 바로 베토벤 집이다. 베토벤의 무덤은 비엔나에 있지만, 본에는 생가가 있다.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 생가로 모차르트의 원조 도시를 주장하듯이 본은 베토벤의 생가를 보유하고 있는 베토벤의 도시였다. 중앙 광장에 베토벤 동상도 있다. 그렇지만 베토벤 콘서트가 계속 열린다거나 베토벤 초콜릿을 팔지는 않는다. 베토벤이라는 사람의 이미지가 좀 심각해서 그런지, 관광 상품으로는 별로 핫 아이템이 아니었다. 도시 자체는 별로 예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구시가가 잘 꾸려져 있었다. 가게들은 글로벌 브랜드와 체인점으로 가득했지만 건물이나 거리 모습은 잘 정돈한 옛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베토벤 생가 외관과 안쪽의 중정

구시가지 북쪽에 면한 가까운 주차장을 찾아 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간 골목에서 베토벤 생가를 만났다. 비슷한 4층 높이의 집들이 이어져 있는 전형적인 구시가지 골목이다. 핑크색 벽에 초록색 덧창을 칠한 수수한 빌딩인데, 생존 시부터 이미 명사의 집이었기에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고 한다. 도시에서 몇 개 안 남은 18세기 건물이라고 되어 있었다. 베토벤은 1770년 12월 생인데, 집 위층의 작은 방에서 태어났을 거라고 한다. 내부는 사진 촬영이 불가능해서 눈으로만 열심히 보았다. 안쪽 중정이 있고, 바닥 층에 부엌, 2층과 3층에 크고 작은 방이 있는 전형적인 집이다. 지금은 방마다 베토벤의 인생과 작품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한다. 조그만 유품이나 그림, 편지, 메모도 많다. 물론 당시에 건물 전체를 쓴 건 아니고 그의 부모가 건물의 한 부분에 살았다. 동명이인인 할아버지를 포함해 궁정음악가들이 근처에 모여 살았던 모양이다. 태어나서 매우 어린 시절만 이 집에서 보냈고, 네 살 때인 1774년에 다른 건물로 이사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본에서 몇 번 이사하며 살았다는데 남아있는 집은 이곳뿐이다. 하이든을 따라 비엔나로 옮긴 해가 1792년이니 20대 초반까지 본에서 자라고 활동을 했다.

중앙 광장의 뮌스터 교회와 베토벤 동상, 근처의 마켓 광장

중앙 광장은 꽤 크고 멋진 뮌스터 성당이 있었다. 뾰족한 첨탑을 여러 개 얹은 성당 앞에는 웬 대형 머리 조각상이 두 개 누워있다. 3세기 초반에 기독교도였던 두 명의 로마 군인이 순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카시우스와 플로렌티우스라는 군인들인데 나중에 본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돌 머리 조각상은 2002년에 제작한 것이라 매우 모던하다. 이미 4세기부터 그 무덤 자리에 사당처럼 기념교회를 지었다는 전승이 있다고 한다. 성당은 전쟁으로 여러 번 무너지고 개축, 증축되어 지금 모습이 되었다. 광장 이름도 뮌스터 광장이다. 그래도 주인공은 역시 베토벤이다. 광장을 한눈에 담아보듯 우뚝 서있는 베토벤 동상은 베토벤이 사망한 직후부터 건립 제안이 있었고, 18년 만인 1845년에 포장을 풀었다고 한다. 돈과 노력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 생전 베토벤의 친구거나 그를 존경하던 음악가들이 모금에 많이 참여했다. 리스트가 거금을 내놨다고도 하고, 슈만이나 멘델스존은 비용 마련 목적으로 곡을 쓰기도 했다.


바로 근처에 마켓 광장도 있었는데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파는 시장이 한창이었다. 화요일에 시장이 있는 걸 보니 상설 재래시장인 것 같다. 상설이 아니라면 보통 주말에 장이 서기 때문이다. 위치가 구시가지 한가운데 관광 핵심 지역이고, 주변은 브랜드샵이 가득한 쇼핑 거리였다. 그래도 구도심에 농산물 재래시장이 자리 잡혀 있고 품질도 좋아서 발길이 많이 오가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우리 가족도 체리와 납작 복숭아를 샀다. 유럽 여행 내내 마트에 갈 때마다 찾게 된 품목이 납작 복숭아다. 한국에는 아직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처음에는 웬 못생긴 복숭아인가 싶었지만, 먹기도 편하고 당도가 높다. 시장이나 마트에 갈 때마다 납작 복숭아와 체리를 찾아서 샀다. 재래시장 과일들이 훨씬 품질이 좋다.

슈만이 말년을 보낸 정신병원 겸 거처는 지금 음악자료관이다.

본의 슈만 하우스(Schumannhaus)는 생가가 아니라 슈만이 죽기 전까지 마지막 2년 반을 보낸 정신병원이다. 요즘 같은 병원은 아니고 정신과 의사의 집에 머물면서 치료받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일종의 개인병원이었다.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가 종종 병문안 왔다는 그 병원이다. 심한 우울증 또는 조울증이었던 것 같다. 항상 아픈 것은 아니어서 베토벤 동상 보러 산책도 다녔다고 한다. 건강할 때는 몇 번 연주여행을 왔을 뿐이었던 본에서 슈만은 환자로 살다가 사망했고 본 공동묘지에 묻혔다. 40년 후 클라라 슈만도 합장했다. 병원은 외관만 유지하고 있을 뿐 지금은 슈만 박물관이자 슈만 음악 자료실 겸 도서관이다. 슈만 음악 행사를 기획하는 사무실이기도 하다. 슈만 팬들의 기부와 후원으로 운영하는 민간 협회였다. 도심과 좀 떨어진 외곽이어서 별로 방문객이 없었다. 슈만이 쓰던 2층 방에는 그 시절 가구와 초상화, 삽화, 엽서와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피아노도 있었는데 슈만이 쓰던 건 아니고 그 시대 것으로 구한 거라고 한다. 외벽의 슈만 부조와 건물 앞의 두상 모두 뭔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정신병원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다.


본에서 다시 랑엔펠트로 돌아오는 길에 자연스럽게 쾰른에 들렀다. 관광객에게 쾰른은 다른 설명 필요 없이 무조건 대성당의 도시다. 대성당만 보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성당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우리 가족도 딱 대성당만 보기로 하고 아예 대성당 주차장에 차를 댔다. 쾰른 대성당은 앞 광장도 굉장히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이 하도 커서 전체를 다 사진에 담기가 쉽지 않다. 광장 주변은 온통 명품 쇼핑거리이고 카페와 식당도 많이 있다. 자릿값을 낼 생각을 하고 아예 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카페 야외석에 자리를 잡았다. 늦은 점심식사를 주문하고 한참 앉아 있었다. 성당 정면을 천천히 올려다보면서 감상할 수 있었다. 첨탑 귀퉁이가 약간 공사 중이기는 했지만 역시 명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로서는 두 번째 방문이었고 처음에 왔을 때 샅샅이 본 성당이지만 감탄스러운 건 두 번째도 똑같다.

쾰른 대성당의 주인공은 동방박사의 유골을 담았다는 황금 상자다.

쾰른 성당은 독일 서부의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성당이다. 이 자리에 교회당은 로마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고딕 성당은 13세기 중반 즈음부터 기초를 놓았다고 한다. 완공이 1880년대라고 하니, 건축 중단된 기간 포함해서 600년 동안 지었다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부서지기는 했지만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성당 주변 구도심이 철저히 파괴되었던 걸 생각하면 이렇게 큰 성당이 서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대신 불길에 그을려서 까맣게 되었다. 고쳐서 새하얗게 된 부분도 있는데, 시커먼 성당이 눈에 익어서 왠지 그게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최근에는 환경오염 때문에 자꾸 부식되어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첨탑에 올라가거나 지하의 보물관을 보는 게 아니라면 입장료는 따로 없다. 500 계단이 넘는 첨탑을 여름에 부모님과 도전할 이유는 없었다. 성당 첨탑에 올라가면 멋진 성당은 안 보이는 거 아니겠는가. 편안한 마음으로 시원한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고딕 성당을 짓기 전인 12세기에 밀라노에서 가져왔다는 '동방박사의 성물'이 이 성당의 주인공이다. 세 동방박사의 무덤이 된 셈이다. 화려한 황금 상자에 보관 중이다. 유적도 많고 보물도 많은 성당이지만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엄청난 규모다. 베토벤이나 슈만도 지나다니면서 같은 성당을 보며 감탄했을 것이다. 그때는 시커먼 성당이 아니어서 느낌이 달랐을 수도 있겠다. 그들에게는 음악적인 영감을 주었을까? 귀가 멀거나 우울증을 앓던 음악가들은 이런 곳에서 좀 더 간절하게 신을 찾고 더 높은 음악적 경지에 이르는 데 도움을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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