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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Feb 07. 2019

벨기에 관광은 브뤼셀보다 브뤼허

28일: 벨기에 브뤼셀, 브뤼허

언젠가 J방송국의 외국인 토론 프로그램에 한 벨기에 청년이 있었다. 각국의 관광 명소들을 소개하고 자랑하는 순서였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중국 등 수많은 관광지 자랑을 늘어놓는 청년들 사이에서 "브뤼허도 있고요"만 반복해서 웃음을 샀다. 그러고 보면 벨기에에서는 보통 브뤼셀만 가고, 더 많이 본다 하면 브뤼허 정도다. 유럽의 큰 나라들 사이에 낀 벨기에는 여행 중 한 번쯤 지나게 된다. 한나절이나 하루 구경하고 네덜란드나 프랑스, 독일로 간다. 우리도 독일에서 프랑스 노르망디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지도 상으로는 네덜란드보다 크지는 않지만 룩셈부르크 같은 소국은 아니다. 어린 시절 볼 때마다 울었던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 배경이 벨기에 북부 플랑드르 지방 안트베르펜 근처다. 찾아보면 흥미로운 곳이 많겠지만 관광객들을 유인하는 도시는 많지 않다. 이번에는 브뤼셀에서는 점심만 먹고 두 번째 관광지로 꼽히는 브뤼허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아침 일찍 랑엔펠트를 출발해 플랑드르 지방에 진입했다. 브뤼셀 그랑플라스 근처 주차장까지 두 시간 반 정도 걸렸다. 독일을 벗어나 벨기에에 들어서니 '서유럽'에 온 느낌이다.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까지 베네룩스 3국이라는 나라들이 지금처럼 확정된 건 1830년대의 일이다. 벨기에 지역은 그전까지 계속 주인이 바뀌었고 자주 전쟁터가 되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 완충지대였고 1차, 2차 세계 대전 때 모두 독일의 프랑스 침공 루트가 되었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에 둘러싸여 언어도 독일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를 다 쓴다. 숱한 전쟁을 겪은 과거를 뒤로하고 유럽연합 본부가 자리 잡으면서 브뤼셀은 유럽의 수도를 자처하고 있다. 그 와중에 벨기에 사람들의 민족의식이 선명한 게 더 신기한 곳이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브뤼셀 그랑플라스와 근처 오줌싸개 동상, 벨기에 와플

작은 나라지만 벨기에는 유명한 아이템이 많다. 벨기에 초콜릿, 벨기에 와플, 벨기에 맥주 등 유명한 먹거리들이 즐비하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는 벨기에 삼겹살도 유명하다. 홍합 요리도 명성이 있다. 벨기에 레이스 같은 수공예품도 유명하다. 핵심 관광 구역인 그랑플라스 근처에 그 아이템들이 전부 모여있다. 유럽 3대 실망 포인트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오줌싸개 동상도 광장 근처에 있다.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다는 건물, 빅토르 위고가 머물렀다는 건물도 있다.


그랑플라스 근처에서 점심 먹고 잠깐 돌아보는 게 브뤼셀 일정이었다. 홍합요리로 유명한 'Chez Leon'에서 점심을 먹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쩌다 보니 브뤼셀 그랑플라스는 세 번째 방문이었고 홍합 요릿집도 두 번째 간 거였다. 관광객은 갈 때마다 늘어나는 것 같다. 카페나 숍마다 사람이 가득하다. 오줌싸개 동상 주변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조그만 오줌싸개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와플집의 대형 초콜릿 오줌싸개들이 더 볼만하다. 마땅한 카페에 자리를 잡지 못해서 결국 그랑플라스 한쪽의 스타벅스에서 초콜릿이 들어간 음료를 마셨다. 생각해보니 그랑플라스 건물 중에 들어가 본 곳은 없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매번 다음 기회로 미룬다. 이번에도 광장 예쁘다는 감탄사만 연발하고, 오줌싸개 동상이 여전히 작고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브뤼허로 차를 몰았다.

중근세 배경의 영화 세트장같았던 브뤼허 운하 길과 광장

브뤼셀을 떠나 브뤼허 구시가의 호텔까지 두 시간이 좀 넘게 걸려, 도착하니 오후 5시가 넘었다. 도버 해협을 향해 뻗은 운하 도시다. 베니스처럼 운하 근처 건물들이 예쁘다고 해서 운하에 면한 오래된 호텔을 잡았다. 이번 여행 숙소 중에 하룻밤 가격으로는 제일 비싼 곳이 되었다. 고급스러운 호텔이었지만 오래되어 시설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었다. 11세기에 플랑드르 지역 중심도시가 되었다는 브뤼허는 15세기까지 유럽 최고 무역항 중 하나로 떠올랐다. 북부 유럽의 무역 네트워크였던 한자동맹과 중남부 유럽으로 내려가는 루트가 교차하는 곳으로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15세기 이후 운하의 퇴적 현상 때문에 도시가 쇠퇴했다. 인구도 줄어 죽은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1차 대전과 2차 대전 때 파괴되지 않고 남았다. 대부분 완전히 파괴된 벨기에에서 옛 모습을 간직한 보기 드문 도시였다. 그 후 관광도시로 급부상하여 재개발을 거듭했다고 한다.


박물관이나 전시관은 문 닫을 시간이었다. 다음 날 프랑스 루앙까지 갈 길이 멀었기에 저녁나절이라도 둘러보기로 했다. 벨기에의 관광도시로 왜 브뤼허를 꼽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호텔 앞 운하 주변부터 도심까지 모든 골목에 중세풍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건물마다 1층은 식당이나 카페, 기념품점이지만 옛 모습을 해치지 않게 관리하는 듯하다. 너무 잘 보존해서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 중앙 광장은 옛 길드들의 사무실이었을 건물들로 둘러싸였고 80미터가 넘는 높은 종루가 우뚝 서있다. 교회와 궁전이 있는 작은 광장은 옆에 따로 있다. 관광에 목숨 건 도시임을 증명하듯 관광용 마차와 투어버스가 대기 중이다. 손님이 모이면 출발하는 투어버스와 택시처럼 줄을 서있는 마차, 운하를 다니는 유람선 보트까지 선택의 폭이 넓다. 천천히 관광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도 타보기로 했다. 투어버스가 더 싸지만 부모님 찬스로 마차를 탔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냥 다녔으면 몰랐을 골목으로 구시가지 주요 장소를 다 돌아다녔고, 마부 언니가 사진 찍는 것도 배려해 가며 안내를 해 주었다.

마차 타고 둘러본 브뤼허 곳곳, 베긴회 수도원이 중간 정류장이었다.

마차 투어는 중앙 광장에서 시작해서 그곳으로 돌아온다. 중간에 말이 휴식하는 휴게소가 베긴회 수도원 연못 옆이다. 베긴회(Beguinage) 수도원은 13세기경부터 있었고 지금도 운영 중인 수녀원이다. 오래된 건물이 운하로 둘러싸여 중세 분위기 사진 찍기 좋은 곳이었다. 근처에 사랑의 호수라고 불리는 장소도 있다. 운하가 교차하는 공원인데 백조가 많아 로맨틱한 분위기에 좋다고 한다. 구시가 북부 구역은 한자동맹 길드들의 화려한 건물이 많다. 우리가 묵은 숙소 근처도 운하를 끼고 장식성이 강한 중세 한자 건물들로 유명한 곳이었다. 남쪽에는 중앙 광장 종루보다 더 높은 첨탑을 가진 성모 교회가 있었고 그 주위로 소박하지만 잘 정리된 집들이 있다. 노약자들을 위한 자선 사업으로 주거시설을 제공했다고 한다. 부유한 도시의 복지 사업이었나 보다. 작지만 정원과 개인 채플이 딸려 있었다는 중세 주택지였다. 당시 노인 복지 시설이었으나 지금은 매우 비싼 주택이라 한다.


마차 투어를 시작한 시간이 6시가 넘었고 끝나고 나니 거의 7시였다. 우리를 안내해 준 마부 언니도 마지막 손님이었는지 곧 마차를 정리했다. 중앙 광장과 골목들을 좀 더 둘러보고 있자니 마부들이 빈 마차를 몰고 뿔뿔이 퇴근을 했다. 화창한 여름날의 저녁은 아직 한낮 같았지만 식당을 제외한 모든 시설은 문을 닫고 조용해졌다. 플랑드르 화파의 그림이 많다는 미술관이나, 십자군 전쟁 때 예수님의 성혈을 가져와 보관 중이라는 예배당이나, 전망이 좋다는 종루는 모두 시간이 늦어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시간이 더 있으면 운하를 따라 산책하면서 경치 좋기로 유명한 지점을 찾아다녀도 재미있을 듯하다. 저녁에 도착해서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는 바람에 24시간도 채 머물지 못했다. 무역 중심지로 번영했다가 침체기를 거쳐 관광지로 회생하고 유네스코 문화유산까지 된 흥미로운 곳이다. 네덜란드도 그렇지만 벨기에도 좁은 공간에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겹쳐있다. 살짝 보고 나니 아직 겉모습조차 제대로 못 본 것 같아 아쉬움만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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