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0일(1): 프랑스 됭케르크, 노르망디 캉, 오마하 비치
여행 29일과 30일 이틀 동안에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을 주로 돌아다녔다. 전혀 다른 두 테마로 계획을 짰다. 하나는 2차 대전이고, 다른 하나는 모네, 고흐 등 인상파 그림 풍경들이다. 성격이 너무 다른 곳들을 이틀간 교차해서 다녔다. 그래서 이 이틀은 테마로 나누어 (1), (2)로 기록한다. (1)은 2차 대전 중 주요 무대였던 곳들이다. 전쟁 초반 영국군의 기적 같은 철수작전이 있었던 됭케르크, 노르망디 상륙작전 박물관이 있는 도시 캉, 그리고 그 유명한 오마하 비치다.
2017년에 개봉한 영화 중에 ‘덩케르크(Dunkirk)’라는 2차 대전 영화가 있었다. 전쟁 초기였던 1940년에 독일군에 밀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드라마틱한 철수 작전을 다룬 영화다. 영어로 '던커크'라고 읽기도 하는데, 프랑스식으로 쓰면 됭케르크(Dunkerque)라고 한다. 이 한적한 해변은 벨기에 국경을 넘어 프랑스에 접어들면 금방 도착한다. 주요 도로를 벗어나 해변으로 나가야 한다. 됭케르크는 노르망디 주 북쪽의 노르(Nord) 주에 속한다. 동쪽은 벨기에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영국으로 가는 관문인 칼레 항이 나온다. 프랑스 노르망디 주보다 바다 건너 영국 도버 항이 더 가깝다. 여느 작은 해변 도시와 다를 바 없다. 평평한 지형과 넓은 모래사장이 있는 이곳에서 그 철수 작전이 있었다.
전쟁의 흔적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검색으로 ‘됭케르크 1940 기념관 (the Museum Dunkirk in 1940)’을 찾아냈다. 해안의 요새 유적을 활용한 기념관 겸 박물관이었다. 한적한 곳이라 넓은 공짜 주차장이 있었는데 차가 몇 대 없었다. 기념관은 원래 '32호 요새(Bastion 32)'다. 기다란 벙커처럼 생긴 공간이다. 1874년부터 방어용 요새였고 프랑스와 연합군이 2차 대전 초기와 철수 작전 때도 썼다고 한다. 그다음에는 독일군이 썼을 것이다. 전쟁을 지나면서 요새는 대부분 파괴되었고 이곳만 남아 복원했다고 한다. 1940년 여름의 그 철수 작전은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이라고 불렀다. 작전 전후의 전쟁 상황, 주변 마을의 당시 모습까지 사진과 함께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백사장에 박혀 있었거나 물 밑에서 찾아낸 비행기와 선박 잔해, 무기, 유니폼, 소지품들을 칸마다 전시하고 있다. 생각보다 내부가 가로로 매우 길어서 끝까지 왕복하면서 양쪽을 다 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이나모 작전은 1940년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9일간 진행되었다. 해안까지 후퇴해서 밀려 나온 40만 명 넘는 영국과 프랑스 병사 중 33만 명을 영국으로 철수시킨 작전이었다. 영화에서는 독일이라고 안 하고 '적'이라고만 설정한다. 간절히 살고 싶고 집에 가고 싶은 어린 병사들을 그렸다. 오뉴월 날씨면 여름이지만 영화 속 해변은 내내 축축한 비가 와서 겨울 같다. 실제 그런 날씨였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지역이다. 심리적으로도 매우 추웠을 것이다. 적군기가 수시로 폭격을 해서 배가 연이어 침몰하고, 결국 군함보다 민간 배들을 동원해서 병사들을 실어 나른 이야기다. 프랑스 군인도 많이 데려갔지만, 그들은 얼마 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야 했고 다수가 사망했다는 이면의 이야기도 있다. 한국 사람들은 흥남철수작전 같은 기억이 있기에 이런 스토리가 더 와 닿는 것 같다. 전혀 다른 철수작전이지만 절박한 마음들은 비슷하다. 기념관을 나와 해변이 바라다보이는 둔덕 위로 올라갔다. 멀리 보이는 오늘의 됭케르크 해변은 맑은 여름날의 햇살을 받아 눈이 부셨다. 푸른 바다와 하얀 백사장이 펼쳐진 멋진 해수욕장이었다.
다음날 오후에는 1944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억하는 해안을 찾았다. 넓은 노르망디 해안 여러 곳에서 진행된 상륙작전이었기에 기념관이나 기념비도 한두 곳이 아니다. 선택을 해야 했다.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거점 도시 캉(Caen)에는 전쟁기념관 겸 박물관(The Memorial de Caen)이 있다. 인구 10만 명 정도의 이 도시는 노르망디에서 루앙과 르아브르 다음으로 큰 도시다. 2차 대전 당시에도 주요 거점이었고 내내 전쟁터였다. 캉 전쟁기념관은 규모가 대단히 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후 상황을 자세하게 전시하고 있고 영상관도 있다. 그러나 기념관 전체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비중은 3분의 1 정도다. 3분의 1은 2차 대전 전체를, 나머지 3분의 1은 냉전 시기를 전부 커버하고 있다. 2차 대전 전체와 냉전 전시도 잘 되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유심히 보게 되는 곳은 상륙작전 관련 부분이다.
크게 다섯 군데 해변으로 상륙하면서 독일군의 대서양 방벽을 뚫기 시작한 상륙작전은 하루 이틀의 전쟁이 아니었다. D-Day라고 불린 1944년 6월 6일 새벽에 시작된 이 전투는 이후 수 주일 동안 노르망디 일대를 초토화시켰고, 민간인만 2만 명 이상 사망했다. 캉 시도 완전히 파괴되었던 모습이 사진으로 있었다. D-Day와 전후 상황에 대한 자세한 다큐멘터리 영상이 있어서 인상 깊게 보았다. 미군이 두 곳, 영국군이 두 곳, 캐나다 군이 한 곳을 맡아 각각 해안을 점령하고 침투해서 내륙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독일군 방어벽이 건재한 탁 트인 해안으로 상륙하는 작전은 결과를 알고 봐도 무모하기 그지없었다. 비교적 쉽게 침투한 곳도 사상자가 많았고, 독일군 저항이 거세고 지형이 불리했던 곳들은 피해가 엄청났다. 하루 종일 공략하고도 겨우 2킬로 정도 침투하고 시체로 온 해변을 덮었다는 곳이 미군이 상륙한 오마하 비치다. 1998년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하는 상륙작전의 배경이 오마하 비치였다고 한다. 실제보다 훨씬 덜 비참했다는 영화 속 상륙(살육) 장면은 그래도 충격적이었다. 다큐 화면에 흑백 영상과 사진으로 남은 몇몇 장면은 잘 안보였음에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촬영한 사람은 살았는지 모르겠다.
캉 전쟁기념관에서 시간을 지체해서 실제 해변을 둘러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름부터 인상이 강했던 오마하 비치만 가보기로 하고 길을 서둘렀다. 오마하 비치나 유타 비치 등은 상륙작전 이후에 미국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캉에서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오마하 비치는 보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한가운데 서 있는 기념비와 추모 조형물만 아니면 너무나 훌륭한 해수욕장이었기 때문이다. 사방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완만하게 이어지는 바다는 '이래도 안 들어올 거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해수욕장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모래사장과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방금 전쟁기념관을 보고 온지라 밝은 표정을 짓기조차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항상 추모만 할 수는 없다. 이런 날씨에 이런 바다는 즐기는 게 맞을 것이다. 나도 슬쩍 신발을 벗고 찰랑찰랑한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이 아름다운 해변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왔던 것처럼 젊은 군인들이 죽고 다치면서 물속에서부터 모래사장 끝까지 쓰러져 있었다고 생각하니 할 말이 없었다. 넓고 평평하게 트인 전망이라 상륙할 때의 위험은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뛰어내린 군인들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전날 미리 독일군 진지를 폭격해서 약화시켜놓으려다 실패해서 독일군 저항도 매우 거셌다고 한다. 상륙하던 군인들은 그걸 몰랐을 수도 있다.
한국 영화 중에도 2011년 '마이 웨이'라는 영화에 노르망디 상륙작전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일본군, 러시아군, 독일군으로 흘러 흘러 노르망디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한국인이 있었다는 기록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다. 잘생긴 장동건과 오다기리 조가 나오는데, 나란히 전쟁에 휘말려 노르망디까지 흘러 와서 겨우 만나 다시 친구가 된다. 그들의 머리 위로 까맣게 미군 폭격기가 덮이면서 시작된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작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그 한국인 포로는 유타(Utah) 해변에서 포로 기록을 썼다고 하니 거기서 생포된 모양이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거기도 오마하 비치처럼 멋지게 펼쳐진 해변이었을 듯하다. 그는 그 해변에서 다가오는 미군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타 비치의 침투 작전은 오마하 비치처럼 처절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상륙 지점이나 날씨 운이 좋았고, 미리 폭격을 맞은 독일군의 저항이 약화되어 미군 측 사상자가 많지 않았다 하니 금방 항복한 모양이다.
오마하 비치 근처에는 미군 묘지도 있다. 상당히 큰 묘지다. 아쉽게도 도착한 시점에 막 문을 닫은 시간이라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수없이 줄지어 늘어선 하얀 십자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내에 미군 묘지가 몇 군데 있다. 이곳이 처음 생긴 대규모 공동묘지라고 한다. D-Day가 1944년 6월 6일인데, 6월 8일에 임시 매장지로 처음 만들었고 그대로 공동묘지로 자리를 잡았다. 이름이 있는 묘지가 9,400기 정도이고 실종자 명단이 1,500명 넘게 벽에 새겨 있다는데 대부분이 D-Day 작전 당일과 며칠 내에 숨진 미군들이다. 대단히 잘 꾸려진 공동묘지여서 자국 전사자 추모에 정성을 다하는 미국의 한 측면을 보게 된다. 어쨌거나 하루 이틀에 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나오는 작전을 해야 했던 전쟁이었다. 이 정도로 피해 규모가 커지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엄두도 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후로도 장소만 바꾸어 더 기막힌 전쟁들이 계속 일어났다. 심지어 지금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잘 기념하고 추모해서 상처를 치유하고 잊기라도 하게 되면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