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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Feb 19. 2019

모네와 고흐의 영원한 주소지가 된 마을들

31일: 프랑스 지베르니, 오베르 쉬르 우아즈

파리에서 출발하는 현지 여행사들의 투어 상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곳들이 있다. 파리에서 멀지 않아서 당일치기 코스로 좋은 지베르니(Giverny)와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도 그런 곳들이다. 지베르니는 모네 팬들에게,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고흐 팬들에게 성지와 다름없다. 인상파 하면 딱 생각나는 대표적인 이 두 화가가 각각 인생을 마감한 곳이며 그들의 무덤도 있기 때문이다.


모네의 집과 유명한 정원이 있는 지베르니는 그 지명이 곧 모네 집 주소를 의미하게 되었다. 1883년에 모네 가족이 이사 와서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활동 중이었지만 파리에서는 만족할 만한 집을 감당할 경제력이 안됐다고 한다. 꽤 떨어진 이 시골에 터를 잡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점점 유명해지면서 10년 후에는 일본식 연못을 파고 연꽃을 구해 심는 등 비싼 조경도 할 수 있었다. 말년까지 40년 넘게 이곳에 살며 수련 시리즈를 비롯해 정원 곳곳을 다양한 각도와 색깔로 그렸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의 사방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수련 시리즈는 규모도 크고, 마치 바다를 보듯 한참 쳐다보게 된다. 그런 피사체를 자기 집 정원에 만들어 놓고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그렸다. 말년에 시각을 잃어서 색깔도 모양도 헝클어진 형태를 계속 그린 이야기는 유명하다. 수십 년간 익숙해진 자기 집 정원이었기에 안 보여도 작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원은 변함없이 잘 가꾼 화원이고 연못이었겠지만, 말년의 모네 정원 그림은 어지러운 추상화 같다. 눈도 안 보이는데 그것마저 '보이는 대로' 끝까지 그렸으니 정말 끈질기다. 그 정원은 다양했던 그의 그림만큼 다채로운 곳이었다. 평소 미술애호가도 아니건만 그림 분위기가 살아있는 듯한 분위기에 말려들었다.

모네의 집은 꽤 큰 2층 저택이지만 넓고 멋진 정원에 비하면 관리실 느낌이다.

모네의 집은 엄청난 대저택은 아니지만 2층으로 된 긴 저택이다. 함께 작업하거나 친하게 지냈던 인상파 화가들과 다른 예술가들이 항상 드나들었다고 한다. 부엌과 식당 규모가 상당히 커서 사랑방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건물은 모네 사후에 자녀들이 관리했지만 2차 대전 때 부서져 방치되었고, 학술기관으로 상속(기부)했다고 한다. 60년대부터 집과 정원을 복구해서 1980년부터 일반에 개방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불과 100년 전 집이라 거의 똑같이 복구되었다. 쓰던 가구나 도구도 상당수 있다. 흑백사진들과 대조해볼 수 있는데 정말 잘 재현해 놓았다. 거실에 해당하는 커다란 작업실은 벽 가득히 그림이 걸려 있다. 지금 물론 모사품이지만 옛 사진에도 잔뜩 그림이 걸려 있다. 창문에서 보이는 정원 풍경도 정말 멋지다. 이런 정원을 꾸준히 가꾸고 사랑방 역할까지 했으니, 어디 나갈 생각도 못하고 여기에만 있어도 바빴을 것 같다.   

그림이 잔뜩 걸린 스튜디오 방과 잘 꾸민 식당의 타일 벽면. 럭셔리 귀족풍은 아니지만 집안 구석구석이 예쁘게 꾸며져 있다.

모네의 정원은 두 부분으로 분리되어 있다. 집 앞에 잘 정돈한 화단으로 칸을 나누어 조성한 정원(The Clos Normand)은 유럽식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이나 아치 등으로 대칭을 살려 큰 구획이 나누어져 있다. 각각의 큰 구획 안에서는 여러 식물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면서 색깔을 대비시키거나 조화시켜 놓았다. 귀족 저택 정원처럼 칼같이 재단된 느낌은 없다. 대신 자유롭게 꽃들이 자라면서 색깔이 어울리고 서로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햇빛 받은 자연적인 색깔 변화에 민감한 정원 주인이었으니 꽃들도 각각의 색깔이 최대한 잘 살아나도록 했을 것이다. 이걸 모네가 의도한 대로 잘 복원해서 관리하고 있는 지금의 관리자들도 정말 대단하다.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 주목적은 유럽식 정원보다는 길 건너에 있는 '물의 정원(water garden)'이다. 일본풍 연못에 일본풍 작은 다리와 연꽃이 있는 정원이다. 수련 연작에 등장하는 연꽃과 버드나무 가지, 그 속에 어우러진 작은 초록색 구름다리가 있는 풍경을 실물로 볼 수 있다. 일본에 가 본 적 없는 모네였지만 일본 문화의 팬이었다. 집안에도 일본 그림이나 도자기, 부채 같은 장식품이 많다. 당시 유럽 사람들이 품은 일본 문화에 대한 동경과 환상은 대단했다. 새로움을 찾는 예술가들에게 더 색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사 온 지 10년 정도 후에 길 건너 땅을 추가 매입해서 이 정원을 조성했다. 근처 하천을 끌어서 그가 생각한 일본풍으로 연못을 만들고 연꽃, 대나무 등 이국적인 식물들을 구해서 심었다. 주변 농촌에서 이상한 것들을 심는다며 걱정했다고 한다. 방치되고 망가졌던 것을 똑같이 복원해서 유지하고 있는 게 더 기특한 정원이다. 지하도로 진입해야 하고 키 큰 나무로 둘러쳐져 있어 완전히 격리된 다른 세상이다. 모네는 일본풍이라고 했지만 결국 그가 상상한 일종의 이상적인 세계다. 그 안에서 우리 가족도 한참을 돌아다녔다. 마침 연꽃 피는 시절이라 연못을 빙 둘러가며 연꽃과 버드나무를 감상할 수 있었다. 조그만 초록색 구름다리는 부러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아서 잠시밖에 머물 수 없었다. 그보다는 사람이 별로 없는 구석에서 연못에 비치는 그림자를 살피고, 그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찾는 재미가 있었다.  

모네의 집 저택 앞으로 펼쳐진 유럽식 정원(the Clos Normand)
모네의 집 앞 길 너머에 조성한 '물의 정원(the Water Garden)'에 있는 일본풍 연못과 다리, 연꽃들

연꽃이 한창인 모네 정원 연못가 그늘에서 꿈꾸듯 돌아다니다가 현실 세계로 되돌아 나오니 7월 초 한낮의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지베르니에는 후기 인상파 작품을 모아놓은 작은 미술관도 있고, 조금 떨어진 교회 묘지에 모네와 가족들의 무덤도 있다. 오후에 고흐의 마지막 하숙집(여인숙)과 마을을 보러 갈 계획이었기에 모네 성묘는 접기로 했다. 모네가 40년 넘게 거주하고 무덤이 있는 지베르니에서 고흐가 70일 남짓 거주하고 묻힌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도착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고흐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아담한 지베르니는 모네의 마을이고 모네가 마치 영주라도 된 듯 주인 같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고흐는 객이었다. 마을은 조금 더 파리와 가까워서 그런지 잘 갖추어진 거주지였고, 고흐보다 좀 이른 시기의 화가 다비니(Daubigny) 집안이 큰 저택과 함께 마을을 잘 가꾸고 터를 잡고 있었다. 이미 세잔, 피사로, 코로 등 많은 화가들이 강변과 들판, 마을 풍경을 그리러 다녀간 곳이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마을회관은 고흐의 그림 그대로다.

고흐는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이곳으로 와서 머물렀다. 1890년 5월 하순에 와서 7월 말에 죽었으니 한 철 여름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짧은 말년을 보낸 곳이지만 갑작스러운 죽음 전까지 매일같이 나가서 많은 그림을 그렸기에 작품이 많고 배경이 된 지점도 많다. 드라마틱하고 짧은 인생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마을 중앙의 안내소에서 '반 고흐 루트(Van Gogh Route)' 지도를 준다. 머물렀던 숙소부터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묘소까지 돌아보고 오게 되어 있고 주요 작품을 그린 지점이 표시되어 있다. 그림의 배경이 된 자리들에는 그 그림과 설명을 푯말로 세워서 비교해볼 수 있다. 마을 회관은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걸려 있는 국기나 광장 앞의 가로수, 쇠사슬 난간까지 똑같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로 가던 길에 한참 지나간 밀밭 풍경이었다. 비포장 길을 한참 가야 해서 길을 잘못 들었나 할 즈음에 고흐의 '까마귀 나는 밀밭' 그림 표지가 나타났다. 까마귀는 없었지만, 마침 계절이 고흐가 머물던 때와 똑같은 여름이라 한낮의 구름 조금 뜬 하늘과 갈래길, 누런 밭 느낌이 그대로 살아났다. 내 눈에는 평온하고 덥기만 하던 밀밭이 그의 그림을 보고 다시 보니 춤추고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땡볕에 힘들게 넓은 밀밭을 지나다 만난 고흐의 그림 포인트 '까마귀 나는 밀밭'

고흐가 머물렀던 라부 여인숙(Auberge Ravoux) 자리에는 민간단체가 운영하는 그의 기념관이 있었다. 안쪽으로 돌아 들어가서 안채의 벽을 타고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위층의 작은 방이다. 거리 쪽에서는 잘 안 보여서 놓치기 쉽고 매표소 운영도 좀 엉성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고흐의 인생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고 위층의 한 방은 영상실로 꾸몄다. 이곳에서 고흐의 생활, 그의 작품에 대한 필름을 보고 나면 지금은 비어있는 위층 객실과 그가 있었다는 작은 방을 안내해 준다. 가구 등을 재현하지 않은 빈방이다. '이 방에서 죽었다'는 설명만 해준다. 설명인즉슨 모두가 '권총 자살을 했다'라고 하지만, 사실 확실한 것은 이미 총을 맞고 돌아온 고흐의 모습뿐, 어디서 어떻게 가슴에 총을 쐈는지(혹은 맞았는지)는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죽기 전에 자살 징후도 없었고, 삶과 작품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매일 열심히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고 한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그림 그리러 나갔다가 난데없이 총상을 입고 왔다는 거였다. 미스터리 느낌을 더해서 흥미를 더욱 유발하는 것이겠지만, 워낙 독특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이라 평범한 설명이 더 이상하게 들리기도 한다.


총상을 입고 돌아온 고흐는 의사들이 왔지만 이틀 후에 죽었다. 일 년 후에 죽은 동생 테오와 나란히 묘지에 묻혀 있다. 담쟁이 뒤로 솟아오르듯 서 있는 두 묘비는 굉장히 한적한 마을 밖 묘지 구석에 있다. 오직 이 묘지 때문에 참배객이 끊이지를 않는다. 우리가 밀밭을 가로질러 도착했을 때도 유럽과 중국의 단체 관광객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병원을 나와 안정을 취할 목적으로 잠깐 머물렀던 고흐는 이제 마을을 다 접수했다. 집착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작은 방의 객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마을 회관부터 교회, 아무 집의 정원과 골목길, 주변 밀밭까지 죄다 그의 작품으로 푯말을 세워서 그림에 어울리는 모습을 유지한다. 삶의 방식도, 주변을 그린 방식도 달랐지만 모네나 고흐의 그림에 사람들이 꾸준히 열광하는 이유는 같은 풍경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자신의 느낌대로 솔직하게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집착이라 할 만큼 성실하기도 했다. 화가의 그림도 일종의 기록이다. 같은 장소나 대상도 자신이 보고 느끼는 대로 솔직히, 그리고 성실하게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덧붙었다.

고흐가 생애 마지막 70일 가량을 보낸 라부 여인숙. 지금은 민간 단체가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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