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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줄기 Nov 22. 2022

런던에서, 베이비(Baby)가

'Remember who you are.'

   사랑하는 아빠, 푸릇한 초여름의 옷을 입은 이곳 하이드 파크(Hyde Park)에는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올 것 같은 새하얀 백조들이 넓게 펼쳐진 호수 위에 점잖게 떠 있어요. 한 손에 봉제 인형을 꼭 쥔 채로 처음 보는 물새를 가리키는 아빠의 유일한 손주 유진이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솜뭉치 같은 구름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고요. 한없이 이어진 산책로의 양옆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오래된 궁전을 지키는 근위병들처럼 묵묵히 도열하고 있네요. 맞아요 아빠, 여기는 정말 런던이에요.

   “회사에서 영국으로 출장을 다녀오래요.” 조금은 달뜬 채로 아빠에게 이 소식을 전해드렸을 때, 아빠는 온 마음으로 함께 기뻐해 주셨었죠. 이제껏 한 번도 유럽 여행을 가 본 적 없는 딸이 책에서만 봤던 곳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아이처럼 좋아하셨어요. 더구나 휴가 기간을 붙여서 사위와 손주까지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을 때는 정말 잘 한 결정이라고 해 주셨고요. 매일 퇴근길에 드리던 안부 전화에서, 아빠와 저는 여행서에 나온 정보들을 나누며 런던에서 꼭 경험해보아야 할 일들의 목록을 정하기도 했어요.

   다양한 것들 중에서도 아빠와 저의 마음을 끌었던 건 수변(水邊)에 자리 잡은 커다란 전망 시설인 ‘런던 아이(London Eye)’였었죠. 원형의 대관람차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의 이름을, 저는 처음에 ‘빅 벤(Big Ben)’이라고 생각했어요. 워낙 커다랗고 또 유명하다고 하니,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거죠. 그에 질세라 아빠는 ‘빅 아이(Big Eye)’가 맞지 않느냐고 하셨고 결국 우리 부녀는 정답이 ‘런던 아이’였다는 사실을 두고 한참을 웃었어요. 하지만 저뿐 아니라 아빠도 런던에 가보지 못하셨으니까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며 서로를 위로했죠. 아빠와 저는 ‘환상의 콤비’였어요.

   그런데 그 ‘런던 아이’를 저희 세 식구가 비로소 탑승했을 때, 저는 그저 담담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흡사 투명한 캡슐처럼 생긴 곳에 오르자마자, 앉아서든 아니면 일어서 서든 제각각 원하는 대로 바깥을 바라보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저도 제법 호기롭게 선 채로 유리벽에 바싹 붙어 흐르는 강물과 조금씩 작아져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어요. 귀여운 유진이를 끌어안고 함께 ‘셀카’도 찍어보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환호하는 곽 서방에게 몇 마디 잔소리도 했고요. 그러다가 저희가 탄 칸이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저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어린 유진이는 깜짝 놀라 “엄마 무서워?”하고 물었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제 곁으로 슬며시 다가온 곽 서방이 말없이 제 어깨를 감싸주었어요.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 때문인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런던의 전경은 흐릿하게 번져갔어요. 저희가 런던에 온 지 닷새 만에, 그리고 아빠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지 열흘 하고도 이틀 만에, 저는 다시 울고 있었어요. 5월의 가장 아름다운 날에, 아빠가 끔찍이 아끼시던 손주 유진이의 뜻깊은 세례 축일에, 아빠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지신 뒤 다시 일어나지 못하셨죠. 구급대원들의 심폐소생 노력에도 허망하게 떠나신 아빠,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저의 가장 소중한 아빠가 떠올라 저는 한참을 울었어요.

   휴대전화에 제 이름을 ‘베이비 김00’이라고 입력해두신 우리 아빠. 불혹을 넘긴 딸을 여전히 아기처럼 여기셨던 우리 아빠. 막내딸 일이라고 하면 열 일을 제치고 그 먼 안성에서 경기도 끝자락까지 두 시간 넘게 직접 운전해서 올라오셨던 우리 아빠. 평생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로도 해외여행 한 번 가 보신 적 없었던, 하지만 언젠가는 가족들과 함께 떠날 여행을 기다리며 영어와 일본어 회화를 차곡차곡 스크랩해 두셨던 나의 아버지. 수십 년 쓰시던 낡은 지갑을 애지중지하시며 당신을 위해서는 단돈 만 원도 아끼시던 절약 왕. 돌아가시던 날까지도 제가 걱정할까 봐 가슴의 통증을 참아가며 힘겹게 마지막 통화를 하셨던 아빠의 마지막 말씀은 “사랑한다.” 였지요.

   우리 부녀의 사랑 고백은 제가 철들기 시작한 어느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돼 왔기에, 사랑한다는 말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말씀은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유진이를 재워 놓고 밤 중에 안성으로 내려가 보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그 사이에 하느님께서 아빠를 데리고 가셨죠. 처음 새어머니의 다급하던 목소리가 침착하게 바뀌시고 “00아, 아빠 돌아가셨어.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와.”라고 했을 때 저는 먼 거리를 원망했고, 바로 내려가지 않았던 저의 망설임을 원망했고, 억지로라도 건강 검진을 받으실 수 있도록 더 적극적이지 못했던 저의 안일함을 원망했어요. 아빠, 얼마나 놀라고 외로우셨어요. 아빠, 사랑하는 우리들을 두고 떠나시려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어요.

   런던 아이는 하늘 가까이까지 올라가 있었어요. 어쩌면 아빠가 우리들을 마중 나와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위를 올려다보았어요. 하지만 보이지 않았죠.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리운 아빠의 모습을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마음은 또 한 번 무너졌어요. 그때 곽 서방이 이렇게 말했어요. “아버님은 항상 우리랑 함께 계실 거야. 많이 보고 싶지? 그래도 너무 많이 울지 말자.”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유진이도 그제야 엄마는 높은 곳에 올라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울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았어요. 천사 같은 아이는 자그맣지만 따뜻한 두 손으로 제 눈물을 닦아주었어요. 두 남자의 마음도 역시, 사랑이었어요.

   지상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어느새 저도 웃음을 짓고 있었어요.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주빌리 가든(Jubilee Garden)의 놀이터로 달려가는 유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평화를 느꼈어요. 놀이기구에 매달려 노는 아이들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한참을 뛰어 노느라 목이 마르지는 않을지, 자나 깨나 아이들을 걱정하는 부모들의 모습은 우리와 다른 것이 없었어요. 그들에게서 유진이를 생각하는 저희 부부의 마음과,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저를 바라보던 아빠의 마음을 떠올렸어요.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이렇게 먼 곳까지 와 있지만, 그 마음은 언제나 그대로라는 걸, 그래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날 저녁 저희는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의 극장에서 뮤지컬 <라이언 킹(The Lion King)>을 관람했어요. 화려한 무대의 연출과 훌륭한 배우들의 춤과 노래에 압도되어, 원작 애니메이션을 뛰어넘는 깊은 감동을 느꼈어요. 아버지를 잃은 주인공 심바(Simba)의 방황과 성장, 그리고 깨달음의 과정은 다음 세대를 이어가기 위한 꼭 필요한 여정이었어요. 선왕(先王)이자 심바의 아버지인 무파사(Mufasa)는 하늘의 구름 속에 얼굴 형상으로 나타나 사랑하는 아들 심바에게 ‘너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라(Remember who you are.)’라는 메시지를 전했죠. 무파사의 이 말이 저에게는 생전의 아빠가 해 주셨던 ‘너는 아빠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딸이야. 그걸 잊으면 안 돼.’라는 말씀과 오버랩(Overlap)되어 다가왔어요. 네 아빠, 잊지 않을게요.

   영국의 대표 음식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는 프랑스나 이태리 요리처럼 뛰어난 맛과 식감으로 미식가들을 사로잡지는 못하지만, 담백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어느 식당에서 사 먹어도 비슷한 맛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저희들은 런던에 와서 여러 번 먹게 되었어요. 하지만 어느새 조금 질리기도 하고, 한 번쯤 고급 음식을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미슐랭(Michelin) 3 스타(3-Stars)급의 식당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나중에 주머니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가서 먹고 싶은 것 다 먹어라’하시던 아빠의 말씀을 떠올리며 꾹 참기로 했어요. 이다음에 제가 지금의 아빠 나이가 되었을 때, 유진이와 며느리,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멋들어진 차림으로 한 번 도전해 볼래요.

   아빠, 저희는 런던에 와서 유서 깊은 명소들, 내셔널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 영국 국회의사당(Houses of Parliament), 런던 타워(Tower of London), 타워 브리지(Tower Bridge),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 등 정말 많은 곳을 다녔어요. 하나하나 다 말씀드리고 싶지만 천천히 해 드려야 더 재미있으실 것 같아서 오늘은 이만 줄일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빠가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며 말씀하셨던 노르웨이(Norway)의 피오르(Fjord)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해요. ‘빙하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U자곡에 바닷물이 들어와 형성된 길고 좁은 만’인 피오르를, 아빠는 정말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라고 하시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저에게 말씀하셨죠. 그래서 제가 꼭 모시고 가고 싶다고 하니, 내색은 않으셨지만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해 보였고요.

   아빠, 저희들의 다음 여행지는 벌써 정해진 것 같아요. 천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피오르, 그곳에서 저희는 아빠를 느끼고 오고 싶어요. 페리(Ferry)를 타고 큰 소리로 아빠를 불러 보기도 할래요. 그렇게 ‘아빠의 영원한 베이비’는 씩씩하게, 제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며, 아빠가 가르쳐 주신 사랑을 나누며 살아 갈게요. 그러니 기억하세요. 아빠는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빠예요. 그걸 잊으시면 안 돼요.


2022년 6월, 런던에서, 베이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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