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저역의 질감을 느끼고 싶다면
모든 것이 빠른 시대입니다. 갈수록 더 빨라지는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은 일 년만 지나도 신제품이 출시됩니다.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이전 모델은 순식간에 구형 모델이 되어 버리죠. 비단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전자제품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요즘은 제품 출시 주기가 너무 짧아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포터블 오디오에서는 DAP가 신제품 출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눈으로 확인되는 스펙 수치가 있으니 새롭게 출시될 때마다 이전 모델과의 성능차가 바로 체감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에 비한다면 이어폰이나 헤드폰 같은 발음체들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더라도 과거의 명기가 꾸준히 유저들 사이에 회자되곤 합니다. 요 몇 년 사이에 이어폰 및 헤드폰의 성능이 어느 정도 상향 평준화된 측면도 있습니다. 신제품이라고 해서 이전 기기에 비해 획기적으로 음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대신 발음체는, 특히 그 중에서도 이어폰은 시기에 따라 유행에 민감한 편입니다. 마치 무슨 패션쇼처럼 말입니다. 매 시즌마다 유행하는 컬러와 재질, 디자인 등이 바뀐다면 이어폰은 제품에 사용된 드라이버의 유형과 방식이 매 년 바뀌는 중입니다. 다이내믹 드라이버에서 BA 드라이버로, 다중 BA 방식에서 다이내믹 + BA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바뀌어 가더니 요즘에는 또 고역에 정전형 트위터를 사용하거나 혹은 아예 다이내믹 + BA + 정전형 유닛의 삼중 하이브리드 제품들도 보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이어폰의 이러한 변화는 DAP의 신제품 출시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적어도 제 경험상으로는 최근 유행하는 정전형 트위터를 사용했다고 해서 이전의 방식보다 더 좋은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유형의 드라이버를 사용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사용한 드라이버를 얼마나 절묘하게 튜닝했는가가 중요하겠지요. 사실 DAP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확실히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이어폰 하나 잘 골라두면 이후 DAP는 바꾸더라도 이어폰은 쭉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카메라에서 바디는 소모품이지만 렌즈는 관리만 잘 한다면 평생 가지고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머리말이 길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엠파이어 이어스의 레전드X는 출시한 지 약 일 년이 되어가는 이어폰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여러 오디오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취향을 저격한 이어폰이라는 평을 받는 이어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빠르게 바뀌어가는 세상 속에서 출시된 지 일 년이나 지난 이어폰이 말입니다. 그러한 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어폰이니만큼 굳이 제품에 대한 설명보다는 대체 무슨 매력이 있길래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 찾아보는 데에 집중하려 합니다. 그리고 레전드X의 매력 포인트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W9, synX, ARC
개인적으로 엠파이어 이어스사 제품을 다룬 첫 공식 리뷰이니 예의상 브랜드가 자랑하는 몇 가지 기술들은 살펴보고 가야겠습니다. 흥미로운 부분들도 몇몇 보이고요. 우선 레전드X는 두 개의 다이내믹 드라이버와 다섯 개의 BA 드라이버가 사용된 하이브리드 이어폰입니다. 다이내믹 드라이버들이 저역을 담당하는데, 엠파이어 이어스사에서는 이를 W9(Weapon 9) 서브우퍼라 칭합니다. 숫자 9는 사용된 드라이버의 지름인 9mm를 뜻할 테고 웨폰이라니.. 비장의 무기 정도 되나 싶었는데 브랜드 사이트에 정말 ‘Secret Weap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도 또 한 가지, 굳이 서브우퍼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두 개의 W9 드라이버 중 하나는 보통의 저역 재생을 담당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만 나머지 하나의 역할은 조금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20Hz 이하의 극저역 신호는 귀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하는 영역입니다. 마치 공기가 진동하는 듯한 느낌, 몸의 떨림 등 청각 외의 감각이 관여하게 됩니다. 이는 어지간한 스피커에 달른 우퍼만으로는 제대로 재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해당 영역을 중요시하는 AV 시스템에서는 (그거 아닌 거 아시죠?) 별도의 서브우퍼 운용이 거의 필수입니다. W9 드라이버를 서브우퍼라 칭하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하나의 드라이버는 오로지 극저역의 타격감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레전드X를 좋아하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레전드X만의 깊지만 세밀한 극저역 표현력을 매력 포인트로 꼽으실 겁니다. 이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녀석이 바로 이 녀석입니다.
스펙을 살펴보던 중 굉장히 특이한 부분이 보입니다. 레전드X의 드라이버는 앞서 말씀 드렸듯이 분명 7개인데 사용된 크로스오버 네트워크가 무려 10-웨이입니다. 드라이버 개수보다 네트워크를 더욱 세분화시킨 경우는 저는 처음 봅니다. 일반적으로 크로스오버 네트워크는 각가의 드라이버들이 재생하는 서로 다른 영역대의 신호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만약 저, 중, 고역 세 개의 드라이버가 사용됐다면 크로스오버 네트워크는 각 드라이버의 사이, 즉 두 개가 사용되는 식입니다. 그런데 레전드X는 오히려 네트워크의 수가 드라이버보다 많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술적 언급은 제가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synX라 명명한 10개의 네트워크를 설정한 이유는 믹싱 엔지니어 등의 전문가들이 소리를 완벽히 조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10밴드 EQ를 통해 각 주파수의 데시벨을 조절한다고 할 때 해당 영역만을 세밀하게 조절하기 용이한 구조로 개발된 셈입니다. 많은 수의 드라이버를 사용한 이어폰들이 한 대역에 복수의 드라이버를 배치하는 것과 달리 레전드X는 사용된 모든 드라이버들이 서로 다른 주파수 영역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그 중 몇몇은 아마 하나의 드라이버에 복수의 네트워크가 관여하기도 하겠네요.
마지막으로 ARC(Anti-Resonance Compound) 코팅까지만 살펴봅시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모든 오디오 기기의 공공의 적인 공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입니다. 불필요한 진동과 상호 간섭을 억제하기 위해 모든 오디오 기기들이 나름의 방책을 강구하려 노력합니다. CNC 밀링을 활용한 금속 인클로저를 사용하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엠파이어 이어스사는 해당 문제를 드라이버, 네트워크, 튜브 등 이어폰 내부 부품에 특수 화합물을 코팅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음질적인 효과가 크다는데, 해당 부분은 역시나 실제로 들어보고 판단하는 게 좋겠습니다.
2.1채널로 들려주는 강렬함
레전드X의 청음은 코드 모조폴리 조합, 아스텔앤컨 SP1000M 및 칸 큐브 등 다양한 DAP와 함께 진행했습니다. DAP의 종류가 달라져도 한결같이 가장 먼저 집중되는 부분이 있는데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레전드X로 음악을 듣는 순간 저역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레전드X의 저역 존재감은 대단합니다. 단순히 저역의 ‘양감’이라는 표현 대신 ‘존재감’이라는 표현을 쓴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분명 전체적으로 저역이 강조된 음색은 맞지만 여타 저역 강조형 이어폰과 레전드X는 느낌이 다릅니다. 무지막지한 양감으로 밀어붙인다기보다는 강렬한 타격감과 극저역에서도 세밀한 질감을 놓치지 않고 표현하는 질감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한 마디로 저역의 재생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앞서 레전드X에서 저역을 담당하는 드라이버의 이름이 W9 서브우퍼라고 말씀 드렸지요. 괜히 서브우퍼라 이름 지은 게 아니라는 걸 소리로 보여줍니다. 가령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때 우퍼의 구경이 작은 스피커와 큰 스피커의 저역 표현력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저역 재생이 뛰어난 스피커라 하더라도 양질의 서브우퍼가 재생해내는 극저역의 깊이감을 따라가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레전드X의 저역이 마치 서브우퍼와 유사합니다. 범상치 않은 깊이감이 느껴진달까요.
저역을 강렬하고 묵직하게 재생한다면 나머지 중고역대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청명하게 표현합니다. 선명하지만 양감은 살짝 줄어들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앞쪽으로 다가서는 듯한 연주의 느낌보다는 조금 거리를 둔 채로 안정적인 연주를 듣는 듯합니다. 이어폰 자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감의 한계는 분명 이보다 더 넓지만, 이를 최대한 활용하기보다는 약간의 여유 공간을 항상 준비해 둡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볼까 싶어 볼륨을 올리면 양감이 많은 저역이 부담스럽게 치고 나오는 식입니다. 레전드X의 여유 공간은 저역의 타격감이 두드러지는 곡을 재생할 때에 비로소 충분히 활용됩니다.
때문에 음역대 전체를 놓고 따졌을 때 레전드X는 요즘 말하는 플랫 지향적인 이어폰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음역대 밸런스가 저역으로 조금 치우친 유형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보컬이 강조되는 것을 선호하는 유저들 혹은 탁 트인 고역의 시원함을 원하는 유저들에게 레전드X는 취향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 건드리지 않은 상태로 듣는다면 말이지요. 하지만 우선 양적인 면에 신경을 거두고 집중해서 들어보면 중고역의 깨끗한 음선과 정확한 정위감 등 엠파이어 이어스측에서 주장하는 기술들의 장점이 소리로도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음역대 밸런스뿐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들었을 때 레전드X는 마치 중고역을 음색이 예쁜 북셸프 스피커에 부족한 저역의 존재감을 채워줄 대형 서브우퍼를 물려서 2.1채널로 만들어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둘을 따로 떨어뜨려서 살펴보면 모두 훌륭한데, 스피커의 체급에 비해 서브우퍼의 체급이 너무 큰 녀석이 매칭된 것과 같습니다.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강렬하게 몰아치는 맛이 있는 음악을 들을 때는 좋겠지만 매일 그런 곡만을 들을 수는 없으니까요.
일반적으로 서브우퍼를 운용할 때 신경써야할 부분이 메인 스피커 재생 신호와의 위상, 그리고 신호의 세기입니다. 위상이야 지금과 같은 경우에 건드릴 수도 없는 부분이고 남은 하나인 신호의 세기를 조절할 방법이 무엇일까요? 바로 EQ입니다. 너무 제조사의 주장을 따라갈 필요는 없겠지만 엠파이어 이어스 측에서 10-웨이 synX 크로스오버 네트워크를 신경써서 제공해 주었으니 저는 그 부분을 충분히 활용해 보려 합니다. 보다 제 입맛에 맞는 음색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저는 60~180Hz 대역을 살짝 내려줬을 때가 보다 듣기 좋았습니다. 중음역대에 맞춰서 볼륨을 올렸을 때에도 저역의 양감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고, 질감이나 리듬감 등 나머지 음질적인 부분들이야 이미 처음부터 그 성능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극저역 재생의 스페셜리스트
엠파이어 이어스 레전드X는 듣는 재미가 있는 이어폰입니다. 리뷰를 작성하면서 레전드X에 관한 글들을 찾아보는 도중 해외 포럼에서 레전드X을 이렇게 표현했더군요. ‘The King Of Dynamics’. 이어폰이 들려줄 수 있는 최상급의 저역 질감을 재생해내는 이어폰이 레전드X가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양감이 조금 과한 게 아쉬웠지만 양은 살짝 덜어내면 되니까요. 질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중고역의 해상력 역시 뛰어나지만 개방감이 뛰어난 유형의 소리는 아니기에 라이브 공연류의 앨범보다는 스튜디오 녹음 앨범을 들었을 때 더 잘 어울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몇 가지 사소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들을 적으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먼저 처음 착용할 때 다이내믹 드라이버에서 들리는 클릭음의 존재, 심한 편은 아니지만 적응하기 전에는 거슬릴 만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9mm 다이내믹 드라이버 두 개를 포함 다수의 드라이버를 사용함으로써 커진 유닛의 사이즈, 착용감이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말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뭔가 다른 지적할 만한 부분이 있을까 싶어서 요리조리 살펴보아도 이밖의 다른 부분은... 아.. 가격이 있겠군요..
이상, 저역 질감의 최고봉 엠파이어 이어스 레전드X였습니다.
*이 글은 셰에라자드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