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k Dec 17. 2019

파이널(Final) D8000PRO

최고의 모니터링 헤드폰을 꼽는다면

  오늘 다룰 기기는 정식 판매가 565만 원짜리 헤드폰입니다. 제가 뜬금없이 가격부터 언급하는 이유는 이 헤드폰은 어느 면을 보더라도 절대 대중적인 제품일 수는 없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해서 이번 파이널 D8000 프로 에디션 리뷰는 헤드폰 마니아들의 눈에 맞추어 작성해보려 합니다.



  정말 좋은 헤드폰들이 계속해서 출시되는 요즘입니다. 여러분은 헤드폰을 고를 때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나요? 만약 자신이 이미 몇 가지 종류의 헤드폰을 보유하고 있다면 다음 구매할 헤드폰은 보유 중인 헤드폰과는 조금 성향이 다른 헤드폰을 고르려 하시나요? 그렇다면 파이널 D8000 프로를 눈여겨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나름 많은 헤드폰들을 접해봤다고 생각하지만 이 녀석은 다른 헤드폰에서 들어볼 수 없는 유니크함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그 유니크함이 또 특이합니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기분을 혹시 아시나요? 같이 한번 살펴보시죠.



다시 꿈틀대는 파이널의 본능


  파이널 오디오 시절, 브랜드의 전설적인 이어폰을 기억하실 겁니다. 바로 피아노포르테 시리즈입니다. 지금처럼 백만 원이 넘는 이어폰이 흔하지 않았던 때에 300만 원이 넘는 가격의 이어폰은 여러모로 충격이었습니다. 문제는 가격보다 소리가 더 충격적이었다는 것이지요. 기억하기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은 물론 그 중에서도 호보다 불호가 더 많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제품은 애초에 일반적인 이어폰 사운드의 틀조차 생각지 않고 제작한 제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극도의 장르 편향적 사운드 튜닝에 가까웠지요. 당시 저에게 파이널 오디오는 대중성이라는 건 발톱의 때만큼도 고려하지 않는 브랜드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브랜드명이 파이널로 바뀌었고 출시하는 제품들 역시 이전과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요즘 파이널 제품들을 보십시오. 어느새 파이널은 마니아들의 전유물에서 가성비의 대명사로 완벽하게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습니다. 가성비 제품을 언급할 때 E 시리즈는 빼놓지 않고 등장하고요. 파이널에서도 학생들 입장에선 E2000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며 E1000, E500까지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파이널은 파이널입니다. 보급형 라인업을 탄탄히 구축한 뒤 다시 슬슬 자신들만의 기술력을 앞세워 고가의 제품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새롭게 등장한 파이널의 첫 번째 평판형 헤드폰이 바로 D8000입니다. 첫 번째 평판형 제품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제가 아는 평판형 헤드폰 제조사들은 평판형 방식이 가지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시리즈를 거듭하며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파이널은 비록 제품은 이제야 내놓지만 진작부터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는 듯 턱하니 AFDS(Air Film Damping System)라는 기술을 선보입니다. 여러 리뷰들에서 소개한 것처럼 쉽게 말해 다이어프램 양쪽에 안전 가드 역할을 할 에어 쿠션을 설치해두고 다이어프램과 마그넷의 충돌 사고를 방지하는 기술입니다. 안전장치가 마련되었으니 다이어프램은 마음껏 뛰놀 수 있게 됩니다.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파이널은 D8000을 기반으로 엔지니어들을 위한 튜닝을 거친 D8000 프로를 출시합니다. 실제로 두 헤드폰을 직접 비교해서 들으면 이게 정말 같은 제품을 기반으로 한 것이 맞는지 의심이 될 만큼 소리 차이가 큽니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 용도에 따른 사운드 튜닝을 가능케 한 부분 역시 AFDS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공기층의 밀도를 한층 높여 다이어프램에 걸리는 댐핑을 강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소리의 울림은 억제되는 대신 한층 빠르고 단단한 사운드가 만들어졌습니다.



  파이널은 D8000 시리즈의 장점으로 헤드폰의 모든 파트를 손쉽게 분해해서 부품별 교체가 가능하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제 눈에 들어온 문구가 하나 있으니, 바로 'future upgrades possible’입니다. 헤드폰 제조사 중 미스터 스피커스는 헤드폰 출시 후 필터 등 소비자가 직접 헤드폰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부품을 개발하여 저렴한 가격에 판매합니다. 아마 D8000 시리즈도 추후 이러한 방식의 업그레이드 서비스가 제공될 것 같습니다. 고가의 헤드폰인 만큼 오랫동안 곁에 두고 사용해야겠지요. 만약 꾸준히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진다면, 혹은 D8000과 D8000프로처럼 전혀 다른 음색의 튜닝킷이 출시된다면 유저에게 이보다 더 좋은 서비스는 없을 겁니다.




이 만한 모니터링 헤드폰이 있었을까?


  이제껏 리뷰한 제품들 중 자연스럽다, 모니터링적 음색을 띈다고 말한 제품이 몇 있지만 D8000프로만큼 모니터링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제품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직해도 너무 정직해서 당황스러운 느낌까지 듭니다. 이러한 소리가 일반 오디오파일들에게 장점이 될지 단점이 될지는 따져봐야할 것 같습니다.



  제조사에서 언급한 대로 스튜디오에서 사용하기에 최적화된 소리라 말하는 이유는 D8000프로를 머리에 얹자마자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모든 악기의 음색과 소리의 정위감 등 이제까지 들었던 어떤 헤드폰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령 곡을 녹음할 때 각 파트별 마이크를 따로 설치한 뒤 믹싱 작업을 거친다고 한다면, D8000프로는 내가 집중만 한다면 어느 파트가 되었든 해당 파트의 소리만 끄집어내서 들을수도 있겠다 싶은 느낌이 들 정도로 개개의 소리 사이 분리도가 뛰어납니다.


  스튜디오를 그려보겠습니다. 콘솔들 앞에 모니터링 스피커가 위치할 것이고 해당 룸은 상하좌우 완벽하게 룸튜닝을 마쳐놓은 상태입니다. 그 속에서 음악은 오롯이 해당 공간의 규모 속에서 통제 하에 재생됩니다. D8000프로가 그렇습니다. 만들어내는 무대 공간의 규모는 그리 큰 편이 아닙니다. 좌우, 전후의 경계가 정확하게 파악됩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이지만 소리로는 내가 어떠한 공간 속에서 노래를 감상하고 있는지가 분명히 느껴집니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이어폰이 떠오르는데 웨스톤 w80에서 느꼈던 공간감을 헤드폰 사이즈만큼 키워놓은 것 같습니다.



  안네 소피 무터가 연주하는 스타워즈 테마곡들은 D8000프로의 공간적 특징이 잘 느껴지는 곡들입니다. 전반적으로 무대가 머리 앞쪽으로 끌어당겨진 곳에 위치합니다. 안네 소피 무터의 바이올린 현소리의 정위감이 무대 전면에, 그리고 평상시 제가 즐겨 듣던 세팅보다 좌우 폭이 조금 좁아진 상태로 연주됩니다. 오케스트라는 바이올린 소리를 뒤에서 감싸 안으며 연주되어 무대의 전후 구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는 무대가 좁은 경우 악기 소리들끼리 서로 겹쳐 들리는 수도 있는데 D8000프로의 분리도가 워낙 뛰어난 덕에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마치 연주장을 수십 겹의 레이어들로 쪼갠 것처럼 소리의 입자들을 하나하나 떨어뜨려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들려주겠다는 듯이 세밀한 표현력이 인상적입니다. D8000프로는 음역대 어느 한 곳 날서지 않은 상태에도 소름끼칠 만큼 담백하게 소리를 표현합니다. 마치 해당 무대 속에서 연주되는 악기들의 소리를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자신하는 곡을 D8000프로로 들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곡의 어느 타이밍에 어느 위치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모든 부분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곡이 하나쯤은 있지 않으신가요? D8000프로로 확인해 보십시오. 해당 곡에 대한 기억이 미세한 부분까지 캘리브래이션되는 경험을 겪으실지도 모릅니다. 제가 요즘 가장 자주 듣는 곡 중 하나가 하비 핸콕이 1983년 발매한 퓨전 재즈 앨범 <Future Shock>입니다. 전자악기의 사용, 반복되는 비트와 멜로디 등 요즘 들으면 단조롭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개개의 소리들의 분리도를 파악하기에 좋은 앨범입니다. 첫 번째 트랙인 ‘Rockit’의 후반부에는 등장하는 악기들이 하나씩 늘어나면서 결국 드럼과 전자악기들의 다양한 사운드가 모두 뒤섞여 연주되는데 복잡한 구성 가운데 넓지 않은 공간임에도 높은 분리도를 자랑합니다. 직접음은 또렷하게 알맹이 위주로 콕 집어서 전달하는 대신 상대적으로 소리의 잔향은 억제되는 편입니다. 음역대 중에선 저역 표현에서 이러한 특징을 잘 캐치할 수 있습니다. 타격감과 양감 모두 적당히 억제되어 있는 편이어서 소리의 끝맺음이 빠르게 느껴집니다. 마치 치고 빠지기의 달인 같습니다.


  D8000과 어느 정도 다른지 궁금해서 직접 비교를 진행했습니다. D8000을 들으니 이제야 그 동안 제게 익숙했던 헤드폰 소리가 들립니다. D8000프로에서 세워졌던 스튜디오 양쪽 벽이 허물어진 느낌, 보다 여유로운 음의 뉘앙스 등 보다 라이브한 소리를 즐기는 데에는 D8000쪽이 나아 보입니다.



  칙코리아 트리오의 <Trilogy2>를 들어봅니다. 라이브 공연에서의 명연들만 추려서 낸 이번 음반에서 공연장의 생동감이나 활동적인 분위기는 D8000의 우위지만 개인적으로 피아노나 보컬, 박수 소리 등 중음역대는 D8000프로가 보다 무게 중심이 낮게 잡혀서인지 보다 안정적으로 들립니다. 특히 개별 악기들을 서로 떨어뜨려 놓고 듣는 데에는 D8000프로로 들었을 때 집중도가 훨씬 높습니다. 반면 드럼 심벌의 찰랑거림, 킥드럼의 타격감, 베이스의 낮은 깊이감은 D8000의 강세입니다. 하이파이 유저들이 바라는 뚝 떨어지는 묵직한 저역의 느낌은 두 헤드폰 중 D8000에서만 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오디오파일들의 판단이 갈릴 것 같다고 언급한 이유가 이 부분 때문입니다.



  두 헤드폰의 특색은 대편성 곡을 들을 때에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정명훈 지휘의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에서 D8000프로는 마치 니어필드에서의 북셸프 스피커가 들려주는 것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D8000은 톨보이에서 들을 법한 강력한 저역의 한방과 무대의 개방감으로 응수합니다. 제가 듣기에 D8000은 헤드폰 스스로 곡에 음악성을 더할 만한 힘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D8000프로는 애초에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 만든 제품 같습니다. 그저 받아들인 신호를 그대로 전달하기만 할 뿐입니다. 본인의 시스템이 완성되어 갈수록 D8000프로의 소리 역시 그대로 따라갈 겁니다. 그런 면에서 D8000프로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가는 헤드폰입니다.




유니크함이 가지는 매력



  오디오파일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익숙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정도 소리가 완성되었다고 느낄 때 이어지는 변화에 대한 욕구는 참기가 참 어렵습니다. 파이널 D8000프로는 이제껏 내가 음악을 즐기던 것과는 또다른 유형의 쾌감을 전해주는 듣는 재미가 있는 헤드폰입니다. 기존의 유니크함이 독특한 음색이나 음역대 표현력을 통해 전달되었다면 이 녀석은 음원의 질을 비롯한 본인 시스템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데에서 오는, 변태적인(?) 쾌감이 있습니다. 4K TV가 출현했을 때 TV 속 연예인들의 잡티를 처음 육안으로 확인한 느낌과도 비슷하달까요. 자꾸만 앞단의 질에 신경을 쓰게 만드는 헤드폰입니다. 엔지니어들이 D8000프로로 작업을 한다면 보다 결과물에 집착할 것 같습니다.


  비교 작업을 진행한 D8000도 매우 훌륭한 제품입니다. 두 제품이 너무 달라서 우열을 가리는 일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 이제껏 D8000과 같은 소리는 종종 다른 최상급 헤드폰들에서 접해봤던 유형의 소리이지만 D8000프로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유니크함에 있어 D8000프로의 손을 들어주려 합니다. 헤드폰 경험이 많은 분들, 많은 제품을 보유하고 또 거치신 분들, 헤드파이가 조금씩 싫증나려 하는 분들에게 추천드릴 만한 제품, D8000프로입니다.




*이 글은 셰에라자드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