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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k Mar 19. 2020

파이널(final) A8000

눈과 귀가 모두 즐겁다

  날씨가 좋아도 마음대로 야외 활동을 하지 못하는 요즘 머릿속으로나마 잠시 상상해 봅시다. 화창한 봄날, 깨끗하게 샤워를 마치고 날씨에 맞는 옷을 꺼내 입습니다. 거울로 한 번 훑어본 뒤 옷과 어울리는 신발을 신고 문 밖을 나섭니다. 외출할 때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날은 왠지 무엇을 해도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은 기분 때문인지 일도 제대로 풀리지 않곤 합니다.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외적인 이유만큼 나 자신에게 일종의 활기를 불어 넣는 내적인 부분도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생각해보면 이어폰이나 헤드폰은 액세서리 역할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얼굴 양쪽에 큼지막한 물체 두 개가 달려 있는 셈이니까요. 유선 이어폰의 경우 제법 두툼한, 그리고 반짝이는 커스텀 케이블은 마치 목걸이를 연상케 합니다. 저에게 있어 이어폰과 케이블은 유일하게 착용하는 귀걸이와 목걸이인 셈입니다.



  과거부터 파이널은 귀금속을 닮은 이어폰을 제작하던 브랜드였습니다. 피아노 포르테를 보세요. 피아노 포르테의 소리에 대해선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지 몰라도 디자인과 마감에 있어선 흠잡을 데가 없는 공예품입니다. 그랬던 파이널이 요즘 들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었습니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만한 소리로 나아가는 대신 독특했던 디자인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아마 숨 고르기였나 봅니다. 소리에 대해 영점이 잡히었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과거 수려했던 파이널의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B 시리즈가 그 신호탄이었다면 이번 A8000은 ‘오태식이 돌아왔구나!’라는 유명한 대사가 떠오를 만큼 모양새가 대단합니다. 한 번 외치고 들어갑니다. 


‘파이널이 돌아왔구나!’



베릴륨 드라이버, 테트라 챔버


  8000은 파이널의 최상급 제품에 부여되는 숫자입니다. 헤드폰에 D8000 시리즈가 있다면 이어폰에는 이번 리뷰의 주인공 A8000이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작성한 D8000PRO 리뷰에서 말한 적이 있지만, 요즘의 파이널은 제품 개발 및 기술 연구에 있어 어떠한 이어폰 제조사와 비교하더라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파이널은 자신의 제품에 투입된 기술력을 단순 소개하는 것뿐 아니라 소리 성향을 파악하는 나름의 지표를 만들어 제공하는데, 이게 굉장히 믿음직스럽습니다. 가령 자사의 기술력인 AFDS의 조절을 통해 소리 튜닝을 달리 한 D8000과 D8000PRO를 공간의 개방감과 소리의 선명도 면에서 평가하는데, 그 지표가 제가 실제로 제품을 들었을 때의 평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제품 제작에 사용되는 기술, 공학적인 측면과 이를 통해 나온 결과물, 즉 주관적인 감성의 측면 사이의 상호 작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번 A8000에도 많은 새로운 시도가 보입니다. 우선 드라이버의 소재로 순수 베릴륨만을 사용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베릴륨은 가볍고 단단할수록 좋은 드라이버의 특성에 안성맞춤인 소재이지만 가공 과정이 까다롭다는 게 문제입니다. 더욱이 A8000의 베릴륨 드라이버는 표면 코팅이 아닌 베릴륨 자체를 가공하여 제작했다고 하니 그 난이도가 더욱 높았을 겁니다. 


  이렇게 가볍고 단단한 드라이버를 사용했을 때 소리에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보이스코일의 움직임에 따라 진동하는 다이어프램이 민첩하게 진동을 시작하고 또 끝맺습니다. 모든 오디오 브랜드에서 이야기하는 보다 정확한 신호 전달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음색이 음역대별 양감의 문제라면 음질은 과도 응답이라 이야기하는 시간상의 정확도가 관여하는 바가 큽니다. 


  양질의 드라이버 다음으론 울림통 역할을 하는 인클로저의 구조입니다. A8000의 내부는 네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노즐이 연결되는 전면부에 드라이버가 단단히 고정되고, 드라이버의 후면에 이 중 구조의 챔버가 배치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면부와 후면부를 고정시킴과 동시에 케이블 커넥터가 위치하는 공간까지 합하면 총 네 개의 공간이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동일한 규격, 디자인의 인클로저 설계라 하더라도 만듦새의 차이에 따라 소리가 크게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미로형 인클로저로 통울림의 극치를 보여주는 오토그라프 스피커는 최근에도 여러 개인 제작자들에 의해 동일한 설계도로 인클로저가 제작되지만 그 소리가 천차만별이라 합니다. 그 만큼 변수가 많은 부분입니다. 실제로 파이널에서도 A8000의 개발 과정에서 대략적인 설계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가닥을 잡았지만 완성시키기까지는 여러 프로토 모델들을 제작하면서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A8000은 파이널에서 새롭게 제작한 베릴륨 드라이버와 새롭게 디자인한 테트라 챔버 구조 유닛이 결합된 회심의 역작입니다. 거기에 수려한 외모를 가졌으면서도 착용감 또한 놓치지 않았습니다. 단일 DD 이어폰치고는 유닛 사이즈가 조금 크게 느껴지지만 착용했을시 귀에 안착되어 편안합니다. 저는 커스텀 이어폰처럼 이어폰이 귓속 깊숙이 착용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인데, 평소 사용하는 팁 사이즈로 착용했을 때 노즐이 그리 길지 않음에도 제법 깊은 곳까지 끼워졌습니다. 유닛의 각도나 귀에 닿는 부분을 적절히 디자인한 결과인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어폰 유닛 외 다른 구성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케이블은 고순도 은도금 동선 재질로 그리 두껍지 않은 굵기에 유연해서 사용 중에 터치 노이즈를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버 이어로 착용할 때 케이블의 고정력을 높여줄 이어 후크가 동봉되는데, 이 녀석은 옵션이 아닌 필수입니다. 꼭 함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케이블의 흘러내림을 방지해줌과 동시에 착용감도 한 단계 향상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말을 안 했네요. 예쁩니다.


  그밖에 노즐에 붙여서 사용하는 여분의 먼지 필터와 사이즈별 실리콘팁, MMCX 분리 도구, 케이스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MMCX 분리 도구는 참 센스 있는 소품이 아닌가 합니다. 너무나도 손쉽게 케이블을 분리할 수 있어 여러모로 유용합니다. 케이스 디자인도 제품만큼 독특한데, 저는 케이스를 보고 A8000의 베릴륨 드라이버가 떠올랐습니다. 상단의 돔 부분은 알루미늄, 하단 및 내부는 실리콘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용하다보니 제품을 꺼냈다가 다시 넣을 때 생각보다 많이 불편하더군요. 잘만 넣는다면 확실하게 두 유닛을 보호할 수 있지만 그렇게 넣기까지 사람을 많이 귀찮게 합니다. 요 부분은 좀 아쉽군요.




헤드폰, 큰일 났구나



  A8000을 들어봅니다. 청음에 사용된 기기는 코드의 모조폴리와 아스텔앤컨의 SP2000 COPPER입니다. 먼저 말씀 드리자면 A8000은 감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어서 배경 노이즈에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모조폴리에 이어폰을 물려 들을 때 배경 노이즈가 거슬려서 제대로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만 A8000은 모조폴리와 연결해도 배경 노이즈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스펙상 A8000의 감도는 102dB이므로 너무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볼륨 확보를 위해 앰프를 요구하지도 않는 적당한 수준입니다. 그래도 경험상 베릴륨 드라이버는 앰프단의 성능에 따라서도 저역의 재생력이 제법 차이가 나는 편이니 A8000도 가격에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A8000의 중역과 고역은 밝고 화사한 편입니다. 맑고 깨끗한 하늘을 보는 것처럼 청량감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저역은 깊고 묵직한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뜻 토널 밸런스가 조금 고음역대에 치우쳐진 것이 아닌가 싶다가도 저역음이 재생되는 순간 적당히 맞아 떨어지는 밸런스 잡힌 음색에 감탄하게 됩니다. A8000의 음색을 무난 혹은 플랫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조화가 맛깔스럽습니다. 보통 음역대를 나누어 소리의 방향이 조금 다른 이어폰들의 경우 대부분은 어느 지점에서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지기 쉽습니다. 밑반찬도 맛있고 메인 요리도 맛있는데, 두 가지를 같이 먹으니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진짜 맛집은 음식 개개의 맛뿐만 아니라 음식끼리의 궁합도 잘 따져야겠지요. A8000이 그렇습니다.



  베릴륨 드라이버가 사용되었다고 했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 포칼 유토피아였습니다. 그러고보니 A8000과 유토피아는 서로 닮았습니다. 웅장한 저역과 깨끗한 중고역 음색이 그것입니다. 음색으로 봤을 때에는 A8000의 중고역이 조금 더 밝은 편이지만 음악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분명 접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유토피아와 함께 사용할 기기들의 매칭을 따질 때 가장 먼저 저역의 웅장함을 잘 살려줄 수 있는지를 고려하는 편이었습니다. 유토피아는 중고역의 질감이 칼 같이 깨끗하고 해상력이 높아서, 만약 저역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을 경우 소리가 너무 경질로 들리기 십상입니다. 


  이는 A8000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A8000은 어떤 기기와 함께 사용하느냐에 따라 만족도가 크게 달라질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는 A8000을 받아서 듣자마자 반했습니다. 이 리뷰도 제품에 반한 상태에서 작성하는 것이니 어느 정도의 편애는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품의 기본 성능이 워낙 좋기 때문에 어디에 물려도 기본 이상의 소리는 내어 줍니다. 다만, 매칭의 경우에 따라서는 탈이어폰급 소리까지도 뽑아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대여한 뒤 처음 며칠 동안은 모조폴리와 함께 사용했습니다. 이때에도 사실 흠잡기 힘들 만한 완성도 있는 소리였습니다. 굳이 지적하자면 저역이 조금 더 깊게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후 SP2000과 함께 들었을 때, 드디어 저는 '이 정도면 굳이 헤드폰이 필요 없겠는데?'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빌리 아일리시 1집 <Don’t Smile At me>의 5번 트랙 ‘Party Favor’의 첫 소절, 기타 반주가 시작되는 파트는 무대 뒤편 먼 곳에 자리가 잡힙니다. 그 뒤 빌리 아일리시의 보컬과 함께 조금씩 무대 앞으로 소리가 당겨지지요. 노래의 시작부터 A8000의 매력이 폭발합니다. 깊이감, 그리고 자연스러운 음상의 이동은 박수를 쳐줘도 과하지 않습니다. 마침 노래에서도 박수 소리가 악기처럼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좌우로 확장된 공간감에 다시 놀랍니다. 보컬, 기타,  박수, 그리고 베이스가 되는 저역의 비트까지 모든 소리의 질감이 하나하나 살아납니다.



  다음은 덴마크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아그네스 오벨의 네 번째 앨범 <Myopia>를 틀었습니다. 아그네스 오벨의 목소리 자체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다가 이번 앨범은 전반적으로 울림 표현이 강조된 룸 환경에서 다양한 악기들이 동원되어 레코딩되어 신비로운 느낌을 극대화시켰습니다. A8000은 공간을 소리의 울림으로 가득 채우는 악기 연주들, 그 중앙에서 또렷하게 들리는 아그네스 오벨의 보컬까지 제대로 표현해 냅니다. 부드러움부터 날카로움까지 질감 표현에 있어서 단점을 찾기가 저로썬 어렵습니다.



  이어폰으로 곡의 느낌을 제대로 살리기 가장 어려운 장르가 아마 대편성 클래식일 겁니다. 음역대 밸런스와 해상력은 물론이고, 무대의 규모와 음상 맺힘 모두 기준 이상을 만족시켜 주어야만 소화해낼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다닐 트리포노프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어 봅니다. 제가 지금까지 들었던 이어폰 중 대편성 클래식을 가장 잘 소화해낸다고 생각한 이어폰은 비전이어스의 엘리시움입니다. 엘리시움의 입체감과 음장감은 독보적인 수준이었습니다. A8000은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이 엘리시움과 전혀 다르지만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엘리시움이 마치 공연장을 그대로 축소시켜서 머릿속으로 들고 왔다면, A8000은 레코딩 엔지니어의 마스터링을 거쳐 보다 듣는 재미를 살려서 가져온 것 같습니다. 




가심비(價心比)



‘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의 비율’을 줄여 이르는 말. 어떤 상품에 대해 정해진 시장 가격에서 기대할 수 있는 심리적 만족도를 말한다.  <우리말샘>


  사람들은 가성비에 관심이 많습니다. 보통 가성비라는 단어는 저렴한 가격대의 제품들 앞에 많이 사용되는 수식어입니다. 파이널 A8000 정도 되는 고가의 제품에 가성비라는 말을 붙이면 헤드파이 마니아가 아닌 이상 많은 분들이 제게 돌을 던질 듯합니다. 돌팔매질을 피하기 위해 약간의 꼼수를 부렸습니다. 파이널 A8000은 가심비 제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어폰에서 이 정도 만족감을 느낀 제품이 몇 되지 않습니다. 본문에 잠시 언급한 엘리시움도 리뷰 당시 리뷰를 해야 하는데 올라오는 구매욕을 억누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현실이 이상을 꽉 부여잡아줘서 여전히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엘리시움에 비한다면 A8000은 가심비가 굉장히 좋은 제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심리적인 만족감은 엘리시움에 뒤지지 않으니까요.


  이제 추운 계절이 지나고 조금씩 날이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또 금방 더워지더라고요. 아마 어느새 여름이 올 겁니다. A8000 정도면 굳이 음질을 위해 더위를 참아가며 헤드폰을 고집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금 덕후가 정도의 길을 걸으면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 느끼게 한 제품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 만약 9000 시리즈가 나온다면 그때는 또 얼마나 발전해 있을지, 여전히 발전 중인 헤드파이 시장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 글은 셰에라자드의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파이널 #A8000 #이어폰 #헤드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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