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t No.1, +남성성
개인적으로 믿고 듣는 브랜드 하나둘 정도는 있으시죠? 저에겐 비전이어스가 그러한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주로 커스텀 이어폰을 제작했지만 요즘에는 커스텀 외에 유니버설 이어폰도 제작하면서, 보다 많은 유저들이 비전이어스 제품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EVE20은 비전이어스에서 매년 하나씩 새롭게 개발하여 출시하는 ‘Exclusive Vision Ears’의 2020년판, 첫 번째 이어폰입니다. 앞으로 해마다 한 제품씩 출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제 2021년이니 올해는 EVE21이 나올 텐데, 재미있는 것이 해마다 제품의 컨셉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EVE 라인업은 자신만의 컨셉을 가진 채 꾸준히 개선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제품만을 위한 일회성 컨셉 설정 및 제작을 반복하는 라인업입니다. 갑자기 EST를 사용한다든지 또는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 다이내믹 드라이버를 사용한 제품을 출시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라인업이라 하겠습니다.
이어폰 튜닝의 트랜드가 바뀌었다
이번 EVE20은 유닛당 6개의 BA 드라이버를 사용했습니다. 마침 제가 레퍼런스로 사용 중인 VE6와 동일한 구성이라 과연 두 제품이 어떻게 다를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비전이어스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그렇지 않아도 두 제품을 비교한 내용이 실려 있더군요. 이에 따르면 EVE20은 VE6와 동일한 드라이버 구성이지만 ‘완벽하게 새로운’ BA 드라이버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VE6가 출시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으니, 그 사이에 많은 발전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제 기준에 여전히 VE6의 소리는 훌륭합니다. 이어폰이 들려주는 전형적인 소리 내에서 음질과 음악성을 고루 갖춘 이어폰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VE6가 처음 출시되었던 시절에는 말입니다. 어느 순간 이어폰 제조사들이 이어폰이라는 틀 자체를 깨뜨리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출시되는 고급 이어폰들과 과거의 플래그십들은 표현력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VE6와 EVE20의 소리 차이도 이러한 부분과 함께 묶어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제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이어폰 사운드가 무엇인지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와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때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일까요? 저는 공간감을 첫 번째로 꼽습니다. 이어폰, 특히 이도에 삽입하여 착용하는 커널 이어폰은 태생적으로 음악이 연주되는 공간의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은 머릿속에서 연주될 뿐, 머리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머리전달함수 및 반사음의 미적용입니다. 청자의 전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재생된 소리는 청음실의 벽과 부딪혀 반사음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머리라는 장애물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 배치된 귀에 서로 다른 타이밍으로 전달됩니다. 우리가 2채널 스피커에서 입체적인 정위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헤드폰에서도 이러한 것들을 적용시켜 들려주기 위한 바이노럴 레코딩 등의 기술이 있지만, 우리가 듣는 음원 중 이러한 기술이 적용된 음원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이어폰 사운드는 이러한 환경적인 제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 안에서 최대한 좋은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굳이 공간의 한계를 깨뜨리기 위해, 보다 입체적인 정위감을 가지기 위해 무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다양한 기술 개발을 통해 이어폰이 가지는 한계 자체를 뛰어넘으려 시도하는 추세입니다. 적어도 후자인 입체감에 있어서는 노력의 결과가 소리로 드러나는 중입니다.
단순히 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레코딩 단계에서부터 이어폰 음감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제작된 음원이 아닌 이상, 이어폰은 이어폰의 장점은 유지하되 단점은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요즘 제조사들이 추구하는 이어폰 튜닝의 방향이 이미 이러한 쪽으로 많이 바뀐 결과, 이전과는 달리 이어폰 음감에서도 이제는 보다 입체적으로, 기존 하이파이 유저들이 이어폰으로 음악을 감상할 때 느끼는 이질감을 줄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다 남성적인 비전이어스 사운드
제가 생각하는 비전이어스의 변곡점은 VE6입니다. VE6까지 이어폰의 틀 안에서 좋은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면, 비전이어스에서 이후 출시한 이어폰들은 이제까지 이어폰에서 들려주지 못한 입체적인 표현을 들려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 대표적인 엘리시움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EVE20은 드라이버의 구성은 VE6와 같지만 소리의 표현 방식은 전혀 다른 이어폰입니다.
이어폰에서의 입체감은 무대 전후 활용의 폭으로 가늠됩니다. 워낙 작은 공간이어서 음상이 단 몇 센티만 뒤로 물러서도 체감되는 깊이의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이어폰에서 입체감은 어떠한 방식으로 향상시킬 수 있을까요? 여전히 귀에 꼽는 착용 방식은 변함이 없고, 아날로그 방식이기 때문에 DSP 등을 적용시킬 수도 없을 텐데요.
경험상 무대의 깊이와 가장 연관이 깊은 부분은 저역의 타격감과 직접음 이후 이어지는 울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일정 이상의 양감이 충족되어야 하더군요. 이래저래 따졌지만 결국 저역의 재생 능력이 무대의 입체감을 좌우한다고 말을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만, 잔향 표현의 경우 꼭 저음역대만의 문제가 아니니 하나씩 떼어서 살펴보겠습니다.
킥 드럼이라든지 리듬을 담당하는 비트가 얼마나 묵직하게 떨어지는지, 또 얼마나 무대 뒤편 깊숙한 곳에서 소리날 수 있는지에 따라 이어폰이 만들어내는 무대의 깊이감이 달라집니다. 단순히 타격감이 강하다고 해서 이러한 깊이감이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무작정 세기만 한 타격감은 오히려 두통을 유발할 뿐이죠. 양보다는 질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음악의 리듬, 그리고 기준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수준 높은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그만큼 밀도 높고 질 좋은 타격감이 필수입니다.
EVE20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이 바로 이 타격감입니다. 제가 요즘 워낙 저역이 강한 이어폰들을 많이 들어서 그런지 EVE20의 저역 양감 자체는 그리 많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무게감, 그리고 단단하지만 딱딱하지 않은 질감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무엇보다 적당히 뒤쪽에서 자리잡는 저역의 정위감 자체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전에 들었던 기억을 꺼내어 비교해보면 엘리시움보다는 무대의 깊이 표현은 조금 덜하지만, 대신 EVE20은 보다 묵직하고 다이나믹스가 강조된 재미있는 저역을 들려줍니다.
고급스러운 질감은 직접음 뒤에 이어지는 잔향, 울림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지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게 참 어려운 것이 울림이 너무 없어도 경질의 거친 소리로 들리지만, 반대로 울림이 너무 강조되어도 소리가 산만하고 정신없이 들립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적당한 것이죠. 적당한 양감, 적당한 울림 그 정도를 맞추는 것이 제조사의 실력일 것입니다. 사심이 충만한 제 눈에 비전이어스는 음식의 간을 굉장히 잘 맞추는 셰프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이런 음식에는 요걸 조금 넣으면 더 맛있겠구나, 매콤함과 달콤함을 어떻게 조화시키면 사람들이 좋아하겠구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선보이는 메뉴마다 맛이 다른데 다들 맛있는 겁니다. 이건 요리사가 어떻게든 맛을 낼 줄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저에게 VE6는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EVE20은 VE6와 맛이 전혀 다름에도 또 이것대로 아주 맛있습니다. EVE20의 전반적인 토널 밸런스는 살짝 아래쪽에 자리잡히는 편입니다. 그런데 저역의 묵직함에 맞추어 중고역도 음선을 아주 살짝 두텁게 살집을 더해 두어서 존재감을 또렷하게 살렸고, 덕분에 묵직한 가운데에도 고역이 무디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한스 짐머가 만든 곡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한스 짐머가 만든 OST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극저역부터 서서이 분위기를 고소시키며 오케스트라가 표현할 수 있는 웅장함을 극대화시킵니다. 이번 원더우먼1984 OST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크나이트 이후 최고의 OST 앨범이라 생각될 정도로 한스 짐머의 모든 것들이 집약되었습니다. ‘배트맨 대 슈퍼맨’부터 이어지는 원더우먼 BGM 멜로디는 이번에도 요소요소에 배치되었습니다.
EVE20과 이 앨범은 유별나게 잘 어울립니다. 이어폰 음감의 장점이라 할 해상력은 그대로 유지하되, 이어폰에서 듣기 어려운 무게감과 입체적인 정위감을 취했습니다. EVE20은 들을수록 ‘다크’한 분위기가 어울립니다. 앨범 중 한 곡만 꼽자면 ‘The White House’를 들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EVE20의 저역 재생 능력을 잘 확인할 수 있으실 겁니다. 깊게 떨어지면서도 음이 사그라드는 잔향감까지 고급스럽습니다. 특히 잔향의 경우 저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악기에 걸쳐 은은하게 확산되는 입자감은 EVE20이 가진 남성성을 마초가 아닌 신사로 바꾸어 줍니다.
일회성으로 넘기기엔 아깝다
듣는 내내 EVE20은 비전이어스의 성공적인 실험작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제껏 제가 알던 비전이어스의 소리와는 무언가 좀 다릅니다. 보다 남성적으로, 보다 진득하게, 보다 무게가 있게 모든 곡을 표현합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그랬듯 오버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내기에는 EVE20의 컨셉이 많이 아깝습니다.
이제까지의 비전이어스 제품들이 상대적으로 여성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식이었다면, EVE20을 시작으로 남성적인 음색의 이어폰 라인업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전이어스 스스로 말한 것처럼 단순히 BA 개수로 모델을 구분하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저로선 소리로는 별로 흠잡을 곳이 없는 이어폰이었습니다. 다만 저에겐 착용감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EVE20 유닛은 두께가 얇고 유닛 사이즈 자체도 그리 큰 편이 아니어서 언뜻 보기에는 착용감도 기본 이상은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귀에 착용해보면 저는 이어폰 유닛과 맞닿는 귀의 윗부분이 압박되면서 오래 끼우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들으면 해당 부위가 아파서 이어폰을 빼게 되더군요.
유닛의 안쪽을 지금처럼 평평하게 만들어 놓기에는 유닛의 사이즈가 충분히 작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은 예전에 엘리시움을 리뷰했을 때에도 저에게 똑같이 문제가 되었던 부분입니다. 아마 제 귀와는 맞지 않나 봅니다. 커스텀 전문 제조사였던 만큼 귀 모양에 맞게 굴곡을 주어 디자인할 필요가 있을 듯한데, 제 귀가 특이한 것인지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2021년입니다. 예정대로라면 새해에는 EVE21이 출시되겠네요. 또 어떻게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할지 벌써 궁금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제품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EVE20이 구형 이어폰이 될 일은 없을 겁니다. EVE20과 EVE21은 전혀 다른 이어폰일 테니까요.
이 글은 셰에라자드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