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J의 이야기 (1)
여러분은 ‘과학’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무엇을 떠올리게 되는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학문?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무언가? 여러분이 떠올리는 이미지가 무엇이든 간에 그 어느 누구도 결코 과학이 없어져야 한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바꾸어보겠다. 여러분은 과학을 평생동안 공부해 나갈 의향이 있는가? 이 질문에 이르면 사람들의 대답은 ‘예’, ‘아니오’로 양분되기 시작하지만, 두 개의 의견 각각에 해당하는 인원을 일일이 새어본다면 아마도 ‘아니오’ 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과학의 미래를 짊어지겠다며 나서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과학이 꼭 필요하지만 선택받은 자들만이 그것을 배워나갈 수 있다’라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다. 심지어 나조차도 과학은 엘리트들만이 공부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생각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허점들과 잘못된 점들을 지금은 매우 잘 알고 있기에, 나와 같은 실수를 다른 사람들이 반복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는 한다.
과학은 대중적인 학문으로서의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 스스로 과학에 다가서려는 노력만 할 수만 있다면 그 어느 누구에게나 과학은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과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스스로도 과학을 대중들에게 어필하여, 과학이 대중적인 학문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선입견을 가지고 선뜻 과학에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중들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겉도는 과학의 모습을 J와 S라는 두 소년, 소녀에 투영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여기서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갈증’이다. 더운 여름이라는 계절적 배경 속에서 두 소년, 소녀는 저마다의 갈증을 하나씩 가진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갈증은 진한 황산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 갈증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 해소의 실마리를 찾아가게 된다.
‘S로부터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고 싶다’라는 갈증이 결국 증오라는 형태의 비뚤어진 감정으로 변하게 된 J의 모습과 ‘평범한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평범한 무언가를 느끼고 싶다’라는 갈증을 통해 고뇌하게 되는 S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과연 ‘나는 어떤 갈증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도 이 소설을 즐길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꿈의 저 편에서 낮게 울려 퍼지던 괴상한 소리가 점점 더 강하게 내 귓가를 자극해 온다. 마치 가상세계에서 현실로 달려가는 기차가 내 눈 앞에 있고 나는 그 기적소리의 도플러 효과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라는 기묘한 느낌에 젖어든다. 하지만 그러한 느낌도 잠시. 빠른 속도로 현실감각이 돌아옴에 따라, 잠을 떨쳐내는 데 온 신경이 집중된다. 겨우겨우 눈을 반쯤 뜨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책상 위를 쳐다보니, 오늘도 또 그 오리 녀석이 난동을 피우고 있다. 귀엽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몇 달 전에 충동적으로 구입한 자명종 시계가 이렇게까지 나의 단잠을 방해하게 될 줄은 짐작도 못했었다. 꽥꽥대는 녀석의 얼굴에 대고 한 마디 쏘아붙여 주고 싶은 기분을 마지못해 억누르며, 몽유병 환자 마냥 뒤뚱뒤뚱 욕실로 발길을 옮긴다.
욕실로 들어서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자,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와 한 눈에 보기에도 피곤에 절어 있는듯한 소년 하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젯밤 내내 뒤척이며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다만, ‘그 녀석’에게 이런 볼품없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 자존심 상할 뿐이다.
여기서 ‘그 녀석’이란 최근 들어 나를 잠 못 이루게 한 어느 골칫덩어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름은 ‘S’. 나와 같은 중학교, 같은 반에 재학 중인 여자아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 녀석을 너무나도 싫어한다는 데 있다. 오만한 눈빛, 무표정한 얼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은 그 시선까지…… 정말 맘에 드는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녀석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시길. 내가 처음부터 그 녀석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으니깐 말이다.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하게 되면서 전학을 왔다는 그 녀석은, 부모님이 교수로 일하는데다가 두 명의 오빠 모두가 명문대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가정환경만으로도 아이들의 동경을 사기에 충분했다.
처음엔 나도, 나와 다른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인식만 있었을 뿐, 그 녀석에게 악감정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고나 할까? 만약 ‘그 사건’만 없었더라면 아직까지도 난 그 녀석에 대해 나쁘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현재 내가 그녀를 엄청나게 증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오만함을 그대로 드러나게 한, 바로 ‘그 사건’ 이후로 말이다.
‘그 사건’이 발생한 것은 한 달 전의 어느 더운 날이었다. 그 날은 유달리 햇빛이 강해서 그대로 앉아있기만 해도 온 몸이 땀에 흠뻑 젖곤 했다. 더구나 내 자리는 창가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수업시간 내내 땀이 소나기처럼 흘러내렸다. 땀으로 온통 젖어버린 교복을 계속 입고 있기에는 너무 찝찝해서, 점심식사를 마치자마자 체육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서둘러 탈의실로 향했다. 그렇게 옷을 다 갈아입은 후에 남자 탈의실을 나와 교실로 향하려는 순간, 여자 탈의실 내부에서 누군가의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인이랑 전화라도 하는 건가? 되게 보고 싶었나 보네.’
처음엔 혼자서 킥킥대며 그 앞을 떠나려고 하였지만, 곧 몇 개의 단어가 띄엄띄엄 내 귓가를 스쳤다.
“상위권이 아닌 애…… 친해지고…… 않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호기심이 생긴 난 떠나려던 발길을 돌리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순간 높고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걔들은 바보야! 너무 싫어!”
무슨 말인지 고민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서둘러 내가 바로 옆 남자탈의실에 들어가자마자 한 여자아이가 여자탈의실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문 틈새로 살짝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탈의실 문을 닫기 위해 몸을 살짝 돌린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S... 그래, 그녀는 분명 S였다.
S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단어들이 뒤죽박죽 뒤섞여 내 머릿속을 헤엄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S는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혼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채 십 여분이 흘러갔고, 점심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난 곰곰이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탈의실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불현 듯, S가 내뱉은 단어들이 내 머릿속에서 하나로 모아지며 완벽한 문장이 만들어졌다.
“상위권이 아닌 애들은 친해지고 싶지가 않아. 걔들은 바보야! 너무 싫어!”
그와 동시에 나는, 그동안 S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해왔는지를 반추해보았다. S가 단 한번이라도 중하위권 성적을 가진 친구들과 어울렸던 적이 있던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 봐도 그런 장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보다 S의 주변에는 항상 상위권 학생들만이 머물 뿐이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심지어 그 학생들과 어울릴 때마저도 S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조차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항상 시니컬한 그 눈빛과 때때로 우리를 향해 지어보이던 조소까지…… 지금까지 S가 지어온 그 몇 안 되는 표정의 이면에 우리 모두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S에 대한 혐오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너는 얼마나 잘 났기에!’
그렇게 난 울분을 삼키며 결심했다. 우월의식에 젖어 있는 그 녀석을 영원히 증오하겠다고. 또한 결심했다. 다른 사람의 가치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그 녀석의 오만함을 기필코 깨부수고 말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