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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serious J Mar 06. 2018

삼두마차(三頭馬車) (2)

2. 로시난테: 저 볼품없는 말이 걸친 허세의 누더기를 보게나.

   사람들은 흔히 스스로의 인생을 특정한 무언가에 빗대곤 한다. 자신의 인생을 ‘꽃’에 비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름’을 인생의 비유 대상으로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대상을 인생에 투영하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나아가 사회 전체의 모습이 획일화되지 않고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사회의 한복판에서, 나는 ‘말(馬)’과 같은 모습으로 인생을 살 아오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드넓은 세상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한 마리의 멋진 야생마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야생마는 몇 번이고 모습을 바꿔가며 매 순간 다른 대지 위를 달려왔던 것 같다.
   이 글에서는 나의 인생을 세 가지 분기로 나눠보고, 그 각각의 분기에 따라 내가 어떤 모습의 말(馬)이 되어 인생을 견인해 왔는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의 가족관계, 교우관계, 좋아하는 음식, 취미와 같은 자잘한 항목에 주목하기보다 나의 인생 그 자체를 바라봄으로써, ‘J’라는 한 인간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파악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 만차의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1863, 귀스타브 도레)


   세르반테스의 유명한 소설 ‘돈키호테’는, 기사도 문학에 빠져 기사(騎士)를 자칭하게 된 한 시골 향사의 여행기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돈키호테가 몰고 오는 온갖 사건과 그가 지닌 특유의 허세가 매우 익살스럽게 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돈키호테 본인은 기사(騎士)로서 사람들에게 내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이 허세가 아닌 참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더 큰 웃음을 유발하는 것 같다. 이런 돈키호테의 모습을 보며 조소를 날리던 사람들 가운데 내가 있었고, ‘어떻게 이런 허세를 보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나의 입가에선 웃음만이 새어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 글에서의 로시난테는 이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허세에 가득 찬 채로 세상을 살아가던 돈키호테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음을 얼마 전에서야 깨닫고 있다. 아니, 그래도 돈키호테는 자신만의 고귀한 뜻을 가지고 꿈을 좇아 간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납득할만한 가치관조차 가지지 못했던 예전의 나는 돈키호테보다도 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볼품없는 내면을 숨기며 ‘기사(騎士)의 말’이라는 허세의 누더기만을 걸친 로시난테가 예전의 내 모습과 더 닮아있다고 볼 수 있으리라.


   앞서 말한 ‘대한민국 입시’의 역병 속에서 나의 야성은 억압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역병을 이겨낸 후 내 야성이 갑자기 분출된 것은 아마도 필연적인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준비기간 없이 분출되어버린 야성은 마치 용암이 흘러 온 대지를 뒤엎듯 내 내면을 잠식해나갔다. 지나친 야성을 지닌 말(馬)은 마치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마냥 다른 말들과의 거리를 두려 하며, 그 어느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한다. 야성이 잠식해버렸던 그 당시의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한 마리의 야생마가 되어 끊임 없이 학문의 들판 위를 달림으로써 남들과 나 사이에 지성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기숙사 한 켠에서 홀로 독서를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나를 더 품위 있게 만드는 길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해왔다. 또한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J는 멋진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조그마한 나의 장점은 포장해서 크게 만들고 나의 약점이 될 만한 사실들은 숨겼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설득을 가장한 강요를 자행해왔으며, 내 생각에 동화되지 않을 경우 배척하며 선입견을 가지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 당시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하면서 즐겁게 살아갔지만, 그것은 허세로 가득한 내 생활을 감추기 위한 ‘얇은 비단옷’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냄새 나는 ‘허세의 누더기’만이 두텁게 내 몸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좋지 않은 일이 닥쳤을 때 내 주변환경만을 탓했을 뿐 정작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기사의 말’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 숨겨진 로시난테의 본모습이 ‘볼품없고 빈약한 말’ 이었던 것처럼, 나도 여태까지 허세만 부려왔을 뿐 내 내면은 볼품없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으로 읽는 돈키호테』 21쪽에 나오는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멋진 말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나의 본질 그 자체를 인정하게 되었을 때 나는 드디어 내 인생의 3분기를 맞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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