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브레멘의 당나귀: 나름 나쁘지 않은 연주였다네.
사람들은 흔히 스스로의 인생을 특정한 무언가에 빗대곤 한다. 자신의 인생을 ‘꽃’에 비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름’을 인생의 비유 대상으로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대상을 인생에 투영하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나아가 사회 전체의 모습이 획일화되지 않고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사회의 한복판에서, 나는 ‘말(馬)’과 같은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오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드넓은 세상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한 마리의 멋진 야생마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야생마는 몇 번이고 모습을 바꿔가며 매 순간 다른 대지 위를 달려왔던 것 같다.
이 글에서는 나의 인생을 세 가지 분기로 나눠보고, 그 각각의 분기에 따라 내가 어떤 모습의 말(馬)이 되어 인생을 견인해 왔는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의 가족관계, 교우관계, 좋아하는 음식, 취미와 같은 자잘한 항목에 주목하기보다 나의 인생 그 자체를 바라봄으로써, ‘J’라는 한 인간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파악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문학에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한번쯤은 그 제목을 들어봤을 정도로, ‘브레멘 음악대’는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동화 중 하나이다. 이 소설에 주인공으로서 등장하는 당나귀는 늙어서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노력하여 친구들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고군분투함으로써 결국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보금자리와 안식을 찾게 된다.
한편, 이 소설이 가지는 감동이 배가 되는 이유는 ‘당나귀’라는 종이 가지는 특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당나귀는 ‘말과(科)’에 속하는 동물이지만, 엄연히 말(馬)과는 다른 종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말이지만 말은 아닌 동물······. 즉 ‘브레멘 음악대’의 당나귀는, 나이가 들어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신체적 문제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정체성의 문제까지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외면적으로 봤을 때, 당나귀는 말에 비해 너무나도 볼품없는 체격과 신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당나귀에 ‘초라함’이라는 특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본질적인 정체성의 문제와 우리가 부여한 ‘초라함’이라는 특성이 만나, ‘브레멘 음악대’에서의 해피엔딩을 부각시킨 효과가 나타났던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실, 난 당나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나는 외모가 잘생긴 것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엄청나게 착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유머감각이 뛰어난 편도 아니고 머리가 엄청나게 좋다고도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나는 명확한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기보다는 뭔가 어중간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최고 수준의 무언가를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말(馬)’로 거듭날 수 있다고 한다면, 실상 내 모습은 말보다는 당나귀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나에겐 허세로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 허세의 누더기를 벗어버리는 데에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하지만 결국 난 내가 멋진 말(馬)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이전의 허세 가득한 내 모습을 탈피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본 모습이 파악됨에 따라 내가 가진 어중간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고, ‘나는 누구지?’,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존재일까?’와 같은 정체성의 혼란까지도 겪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너무 힘들었다. 나의 존재감에 대한 의문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고, 이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역시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다. 시간이 흘러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더 넓은 세상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내가 가진 특징들의 어중간한 점들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싶어하는 무언가를 나는 50%나 가지고 있어. 반면, 다른 사람이 콤플렉스로 여길 수도 있는 무언가는 50%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지.
내가 특별하지 않음이 결코 가치가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란 걸 지금의 난 분명하게 알고 있다. 분명, 나는 말(馬)이 될 수는 없는 존재이다. 키가 작기 때문에 모델을 할 수도 없고, 가수가 되기에는 가창력이 부족하며, 화가를 꿈꿀 수조차 없는 그림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사실 수많은 사람들은 ‘당나귀’에 더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각자 최고로 잘하는 거 하나씩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이상론에 불과하며, 현실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그저 ‘보통’의 수준에서 만족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말’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모습은 초라할지라도 외부환경에 대한 저항력은 말보다 당나귀가 더 뛰어난 법이니깐 말이다.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 외부에서 아무리 짓눌러도 굴복하지 않고 살아내는 것, 바로 그것이 ‘소시민’이라 불리는 우리 당나귀들의 삶이 아닐까? 스스로가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는, 멋진 말이 되기를 소망하기 보단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당나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이 글의 제목인 ‘삼두마차(三頭馬車)’에서 내 여생을 견인해 갈 마지막 말(馬)이 실제로는 당나귀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동안 내 ‘인생’이라는 마차를 끌어왔었던 ‘부케팔로스’보다도, ‘로시난테’보다도,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떠한 말들보다도, 이 자그마한 당나귀가 살아갈 삶이 더 아름다울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브레멘의 당나귀가 그러하였듯이, 나도 내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며 매일매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 섰을 때 아래와 같이 회고할 수 있다면, 나는 아마도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이리라.
J야, 나름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