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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인생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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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Aug 30. 2019

01. 나이 들어도 송두리째 틀릴 수 있다.

가능성을 두는 것과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대학교 시절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던 나는,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취미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자연스럽게 혼자 보내는 시간에는 사색을 하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나면, 그에 대해 생각하고 정의하는 것을 좋아했어서, 그 상황에서 내가 왜 그랬는지 그 이유에 대해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 보고, 다른 사람들 눈에 나는 어떻게 비쳤을지 생각해보고, 만약 추후에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더 나을지, 머릿속에 나만의 매뉴얼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만의 매뉴얼은 계속해서 수정을 거쳐갔다. 비슷한 상황이 발생해서 내가 준비한 대로 대처하더라도, 새롭게 부족한 점이 눈에 띄어서 개선할 여지가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의 시선도, 내 감정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나름대로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서 절충안을 찾아 매뉴얼을 개선했는데, 그러다 보니 개선된 매뉴얼에 대해 자신이 있었다. 누가 어떤 상황에 대해 나에게 상담을 해왔을 때, 내 매뉴얼에서 뽑아서 '나는 이럴 때 이렇게 해' 하고 공유해주면 대부분 '넌 참 현명하다'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왔으므로, 나는 내 매뉴얼이 참 마음에 들었고, 내가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매뉴얼 수정만 20대 초반부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해왔으니, 지금 시점의 내 매뉴얼은 완성본이라 자부했고, 실제로도 최근 몇 년간 자잘한 수정 외에 메이저급 수정은 없었다. 자잘한 수정조차도 굉장히 적어서, 30대 초반을 지나고 있는 나는 이제 많이 현명해졌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메이저급 수정이 필요한 순간이 왔을 때, 아직도 내 매뉴얼이 이 정도의 수정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이가 들 수록 살아가는 방식에 유연성이 적어지고, 내 방식이 항상 옳은 안하무인의 중년이 되기 쉽다고 많이들 얘기를 하는 데다가, 실제로 나도 그렇게 느낀 적이 많아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칫하면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었네, 유의해야지' 하고 생각하며 '맞음'과 '틀림'사이에 (그러나 '틀림'에 더 가까이) 서있었을 때와, '내가 정말 틀렸구나'라고, 내가 오로지 '틀림'의 땅에만 서있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참 많이 달랐다. 내 가치관이 지반채로 흔들리는 느낌이었는데, 그 흔들리는 정도가 그동안 나 자신에게 확신에 찼던 만큼이었기 때문이지 싶다. 이런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서, 인정하는 데에도 가장 믿음직한 친구의 확인이 필요했다. 내가 정말 틀렸다는 확인이.


사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참 우습다. 이제 30대, 그것도 초반을 지나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이 겪어봐야 얼마나 많은 상황들을 겪었고, 현명해봐야 얼마나 현명하다고 믿고 있었는지. 주변을 바라보면 60대, 70대가 된다고 해서 득도한 것은 아니고, 나이와 현명함은 비례하지 않는데. 나는 나름 고민을 많이 했다고, 나름 다양한 문제에 대한 답들을 찾아 두었다고 얼마나 자만했으면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지반이라고 일컬을 만큼,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렸을까 싶다. 나름 겸손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내지는 자신감이란 교만함과는 또 달라서였을까. 그 흔들림의 강도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인 이유는. 더불어 생각만 하는 것과, 그 상황에 정말로 맞닥뜨리는 것은 정말로 많이 다르기 때문일 테다.


이 정도의 메이저급 수정은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가 애매하다. 스스로가 현명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가치관의 유연성을 더더욱 놓을 수 없으므로. 하지만 추후 일을 걱정하기 이전에, 우선은 이번 일을 마무리해야 하므로, 새로 배운 내용을 토대로 매뉴얼에서 기초 원칙을 수정했다. 그리고 수정의 결과는, 다른 원칙들조차도 개선될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새롭게 깨달은 그 가능성 자체로 인하여 연약해진 전반적인 매뉴얼의 체계와, 더불어 연약해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다. 나이 들어서 나의 가치관을 수정한다는 것이 이 정도의 큰 일인가 싶고, 벌써 이렇다면 10년 후, 20년 후엔 이러한 수정이 얼마나 쉽지 않으려나 싶다. 스스로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틀렸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생각과 행동의 차이가 이렇게나 컸었나. 일단 계속 살아가야 하니, 스스로에 대한 격려를 해주기는 했다. 하지만 나이 들어도 이렇게 의심과 검증이 쉴 틈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니, 잘 산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도 참 피곤한 일이다.


I'm resting this aftern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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