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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삼숙 Sep 06. 2020

다만 가능하다면 악에서 빨리 좀 구하소서

연수원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다. 저녁을 먹고, 이제 본격적인 술자리의 시작인가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교수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어 보자고 제안하셨다(갑분싸...). 아,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여기까지 놀러 와서 갑자기 힘든 일 타령이라니.


고작 스물여섯살이었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대체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서울대 떨어진거? 친구들 못 만나고 틀어 박혀서 고시공부 했던 거? 고시생 때 남친이랑 헤어지고 슬펐던거? 내 차례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고 나는 다급하게 유치원 때의 기억까지 탈탈 털어 보았지만 딱히 내세울 만한 힘들었던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울대 떨어진걸 얘기하자니 거기에 비서울대가 더 많았고, 고시생의 고충을 말하기엔 한두명을 제외하고는 3~40대 장수생 언니 오빠들이라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었다. 전 남친이랑 헤어진 얘기는 거기에 그 당시 현 남친이 있어서 자체 필터링을 해야만 했다.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어내진 않았을텐데.


반면, 상당 수의 동기들은 각자의 고통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고시생활이 예상치 못하게 길어지는 것에서 오는 여러 고충이 있었고, 가정형편 때문에 합격하고도 바로 연수원에 입소를 하지 못하기도 하였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도 했고, 오랜 기간 병을 앓아 왔거나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다. 차마 말하지 못한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다. 다 같은 시험보고 거기 똑같이 앉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낯설었다. 그 와중에 낯설다는 생각이나 하고 앉아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할말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저런 좌절도 해보고 공과 사로 사람 때문에 힘들어도 봤다. 예상치 못한 구설에 오르내린 적도,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순간도 있었다. 응급실에도 처음 가봤다. 적응을 하지 못했던 시간도, 감당할 수 없었던 시간도 있었다. 그래서 도망친 적도 부끄럽지만 있었다. 일도 사람도 내맘처럼 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게 더 일반적인 일이 라는 걸, 대체로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전까지 나는 방탄유리로 된 무균 온실 거주자였다.


언제가 누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처럼 원하는 걸 다 성취해 온 애들은 원하는 대로 안 될 때 특히 더 힘들어 한다고. 고통의 본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작 그 일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기 보다 계획대로 흘러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에 대한 부정, 집착, 분노로 고통을 느끼는 것일 수 있다고.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방탄 온실 덕분인지 타고난 성정 때문인지 나는 여전히 진짜 어른이 되지 못하고 쿠크다스 멘탈의 어른아이에서 성장이 멈춘 것 같기도 하다.




근력 운동을 하면 처음엔 고통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많은 중량을 들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나는 나의 고통의 역치가 몇 단계는 높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역시 프로 설레발러인 나의 순진한 착각이었다.


힘든 일은 그냥 매번 힘들더라. 나는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내 고집대로 하다가 후회하는 스타일이다. 거기로 가면 바닥이야 라는 경고사인이 있어도 정말 그럴까? 아닐 것 같은데? 하고 굳이 끝까지 기어 내려간 다음 '아, 정말로 이 곳이 바닥이었군'하고 깨닫는 스타일. 기억력 안 좋은 프로 후회러라고나 할까. 마음에는 근육 따윈 존재하지 않는지 그 때마다 타격의 여파로 중심을 잡고 서 있기가 어려웠고 매번 나가 떨어졌다. 어쩌면 마음의 역치란 너무 높아서 훨씬 더 고강도의 고통을 겪어 봐야만 레벨업 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그런데 그건 사양하겠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예전에 지방에서 근무했던 때 서울을 오가며 기차 안에서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의 일부분이다(노르웨이의 숲, 솔직히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청춘의 사랑과 아픔이 주제라는데 감상력이 일천한 나는 호르몬 과잉인 변태 소년의 욕정 분출기의 느낌이었다).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 뿐 아니라 모든 고난으로 인한 슬픔에 통용되는 말인 것 같다.


하루키 아저씨의 말처럼 고난을 극복하며 얻게 된 그 어떤 교훈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클리셰를 또 한번 몸소 체험할 뿐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것을. 다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하는지 헤아릴 수 없는 탓에 두렵고 또 괴로울 따름이다.




나는 직업상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간접 경험할 일이 많다. 시간이 갈수록 인생은 참 불공평한 것이지만 고통이나 불행의 총량은 신기할 만큼 모든 개인에게 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다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돈으로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업의 오너도, 고고하게 살 것만 같은 대학 총장님도,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는 힘 있는 정치인도, 잘 나가는 대기업 임원도, 화려하고 쏘쿨하게 살 것만 같은 연예인도, 그리고 나 같은 일반인들도 그들 개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에게 주어진 불행이 누구에게나 있었고 그 규모와 정도는 상당했다. 속사정까지 알고 나면 부럽다, 저렇게 살고 싶다고 느껴지는 삶은 없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행복 찾기가 힘이 드는 걸까. 왜 남들에게는 살면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 왜 나한테는 몇 번씩이나 일어나는 걸까. 그렇게 하염없이 저 아래로 침전하다가도 남들도, 특히 저렇게 대단한 사람들도 시련과 불행을 감내하며 산다는 생각이 들면, 아 나만 이런게 아니구나 하고 위안이 되기도 한다. 부끄럽지만 나는 이렇게도 이기적인 인간이다.


가끔씩 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 동굴 속에 들어가 하루종일 넷플릭스를 끼고 앉아 과자 몇 박스를 박살내고, 한잔 두잔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다가 다음날 극심한 숙취와 현타로 몸서리치게 되는 순간들.


사실 그 순간에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언젠간 지나간다는 것을. 어차피 지나갈 일을 내가 쓸데없이 상념들을 붙잡고 앉아서 불필요한 셀프 고문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 팔자 지가 꼬고 있다는 것을. 원래 머리와 마음은 따로 논다.


그렇게 한없이 가라앉는 날에는 차라리 밖으로 나가 그저 걸어보자. 폭염, 태풍, 미세먼지...... 이제 더 이상 댈 핑계도 없으니 다시 등산을 가보자(말은 쉽지). 유튜브를 틀어놓고 요가와 명상을 한 번 해보자. 제목에 끌려서 사놓고 그냥 던져둔 책을 읽어보자. 재미없으면 다시 던져 버리고 <나의 아저씨>, <멜로가 체질>을 다시 정주행 하자. 좋은 친구와 맛집탐사를 해보자. 술은 기분 좋을 때만 마시자.


알고 있다. 어차피 다 지나가고, 결국에는 다 잘 될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빨리 흐르길 기원해보자.


그리고 기도해보자. 악에서 구하소서. 다만 가능하다면 최대한 빨리 좀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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