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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삼숙 Mar 08. 2020

싸대기 유발자 구남친의 마지막 선물

어릴 때부터 내 삶은 정말 단조롭고 심심했다. 학교 갔다가 학원 갔다가 집에 와서 숙제하면 하루가 다 갔다. 학창시절 나의 유일한 일탈은 공부 안하고 드라마 보기, 시험 끝나고 노래방 가기, 야자 째고 영화관 가기, 엄마 몰래 연애하기 등 '일탈'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참 민망한 수준이었다. 부끄럽지만 술도 대학교 때 처음 먹어 봤다. 그냥 나는 재미없는 범생이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맛집 찾아다니기, 친구들이랑 수다떨기, 가끔 과 동기들이랑 술 마시기 등의 평범하고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취미생활 외에는 고시공부만 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미팅 한 번 못해보고, 클럽 한 번 못 가봤다(아, 원통하다). 정말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노잼인 내 인생과는 180도 다른 삶을 살아온 그를 나는 스물여섯 갓 넘어서 만났다. 그는 공부보다는 친구가 좋았던 학창시절을 보냈고, 그 지역에서 소위 싸움짱으로 통하였다 하며, 어린 시절 철 없는 행동으로 경찰서까지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솔직히 본인 말이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서 소위 일진으로 떵떵거리며 살던 그는 불현듯 깨달음이 와서 갑자기 고2때부터 미친듯이 공부에 매진하였고 결국에 법대에 합격하였다는 무슨 전설 속 주인공 같은 스토리였는데...... 아무튼 그는 나랑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다.


오리엔테이션을 겸한 엠티에서 두 명씩 짝이 되어 서로의 왼발과 오른발을 묶고 함께 뛰는 2인 3각 달리기를 하게 됐다. 진행자가 들고 있던 주머니에서 각자 번호표를 뽑아 짝을 정했다. 우리는 그렇게 짝이 됐고, 쑥스럽게 처음 인사를 한 그날 손을 잡고 함께 달렸다. 승패는 기억나지 않지만,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건 그냥 운명이었다.


우리는 항상 정말 많이 웃었고, 배가 찢어질 때까지 웃었다. 함께 가던 라멘집은 아직도 나의 인생 라멘집으로 남아 있을 만큼 감동이었고 저녁마다 걷던 공원에서 바라보던 해질녘 풍경은 늘 꿈 같이 아름다웠다. 공부하기 싫을 때면 나와서 몇 바퀴씩 돌고 돌고 돌았던 복도는 우리만의 산책코스가 되었다.


그는 365일 하루도 빠짐 없이 날 데려다 주었다. 공부를 하다가도, 술을 먹다가도, 운동을 하다가도, 심지어 자다가도 내가 집에 간다고 하면 달려왔고, 엘레베이터에서도 납치 당할 수 있다며 꼭 14층 대문 앞까지 날 데려다 놓고 갔다. 이전까지 연애에서 지적받아 온 나의 문제점은 애교가 1도 없다는 것이었는데(나는 자기, 여보야 이런 애칭은 감히 입에 올려 본 적도 없고, 항상 정직하게 "야, OOO" 하고 남친의 이름을 불렀다. 연애라기보다는 브로맨스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그는 내가 입을 열고 무슨 말만 하면, 심지어 "응"이라고 답만 해도, 너 지금 응이라고 말한거냐고 되물으며 내가 귀여워 죽겠다고 미치겠다고 하였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미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애교까지 장착했다면 그는 벌써 사망했을 것이다. 그는 습관적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너는 왜 이렇게 예쁜 것이냐, 어떻게 인간이 콧구멍까지 예쁠 수가 있느냐, 심각하게 귀여운데 혹시 나이를 속인 것이 아니냐 등의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하였고, 우리는 그 의혹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다가 또 깔깔대고 웃었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세상에 우리보다 행복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그 순간이 내가 가장 반짝이는 때였다는 것을 그 땐 미쳐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금방 지나갔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지방으로 발령이 났고, 우리는 롱디 커플이 되었다. 비가 억수 같이 내리던 8월의 어느 날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다가 한통의 제보를 받았다. 나는 제보자로부터 그 여자의 연락처를 넘겨 받았고,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눌렀다. 그녀는 무슨 억하심정을 품었는지 불필요하게 소상히 그와의 일을 이야기 하였다. 믿고 싶지 않은 TMI였다. 그렇게 난 한순간에 아침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


놀란 그는 밤 12시에 차를 몰고 내가 있는 곳까지 장맛비를 뚫고 내려 왔다. 새벽 4-5시는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울면서 해명하라고 소리쳤고, 그는 횡설수설 아니라고만 했다. 휴대폰은 다 지워진 상태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풀스윙으로 귀싸대기를 날렸는데(태어나 처음이었다), 그만... 빗맞았다. 인간의 반사신경은 생각보다 뛰어나서 뭔가가 날아오면 자동적으로 피하기 마련이다. 날아오는 내 손을 그도 자동 반사적으로 피했다. 나는 드라마에서처럼 김치 싸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짝'하고 때리면 손이 얼굴에 '촥'하고 감기는 그런 상당히 극적인 장면을 상상했는데,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기를 모은 후 오른 손을 들어 풀스윙으로 귀싸대기를 날렸고, 이번에는 찰지게 성공했다. 그리고 나서 성공의 감격 때문이었는지 난 폭풍 오열을 하며 양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온 힘을 다해 마구 마구 때렸다. 그의 반사신경은 갑자기 작동을 안 하게 된 건지, 그는 그렇게 가만히 서서 잠자코 맞았다.


그 후로도 우리는 두어 달을 더 만났다. 그와 헤어지기에는 내가 그를 너무 좋아했다. 그가 없는 시간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깨진 신뢰는 회복될 수 없었고,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이별 후에 나는 크게 휘청거렸다. 그는 나의 남자친구였고 가장 친한 동료이자 친구였으며 같은 꿈을 꾸는 동지였고 나의 소울메이트였다. 그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주었던 것이 패착이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지역은 그의 고향이었고 그는 주말마다 내려와 다양한 곳에 날 데려가 주었는데, 헤어지고 나니 그곳은 지옥이 되었다. 지천이 그와 걷던 곳이었다. 출근하기 조차 힘들었다. 믿기 힘든 현실에 나는 그가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그는 그답게 정말 잘 먹고 잘 살았다. 나는 분노를 동력 삼아 살아 갔고, 영원할 것만 같던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허무하게 마무리됐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서른이 되었다.




손절의 순간 사람은 민낯을 드러낸다. 이혼 과정에서 그는 나에게 자신의 너무 많은 것을 오픈했다. 그리고 나는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아서 그 장면들은 한동안 내 마음 속에 문신처럼 남았다. 경멸을 가득 담아 나를 쳐다보던 눈, 손가락을 들어 내 얼굴을 향해 찌를듯이 들이 대며 난 진짜 니가 너무 싫다 라던 말, 소파에 누워 니네 집으로 가라고 말하며 TV를 켜던 모습, 들고 있던 걸 집어 던지던 장면, 입버릇처럼 했던 말 “난 이 결혼을 끝내고 싶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던 그의 부모의 생각지도 못했던 나에 대한 평가들. 남이 나를 증오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일은 그의 부모가 일방적으로 하달하는 정책의 내용과 그 하달방식에 대해서 내가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대의사를 표시할 때마다 발생했다. 그는 내가 가족의 의미를 모르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다시 이혼을 선언하고 다음 날 표를 끊어 필리핀으로 여행을 가버렸고, 나는 혼자 그의 부모를 찾아가 잘못했다고 빌어야 했다. 공부만 잘했지 철이 덜 들었다고, 남자 비위 맞춰주는게 얼마나 쉬운건데 그걸 못해서 이 사단을 내냐고 꾸중을 들었다. 소식을 들은 그는 귀국했고, 나를 용서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다.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이 말하면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실이 된다. 정말 그랬다. 세 사람이 떼로 비난을 퍼부어대니 내가 정말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고 내 가치관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입을 다물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수면 아래에서 나는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한 번은 그의 어머니가 한 말 때문에 속상해서 참다가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본 적이 있는데, 그는 내 성격이 꼬여서 곱게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이라며 앞으로는 혼자 새기고 자기한테 말도 꺼내지 말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의 부모로부터 지시사항이 내려오면 나는 무조건 따라야 했고, 부정적인 의사표시는 사실상 금지되었다(북한인 줄). 회사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레벨의 복장 터짐은 나를 병들게 했고, 나는 그렇게 빛을 잃어갔다.


마지막 순간 그는 나의 인성을 운운하며 나와 한 순간도 함께 있기 싫다고 집을 나가면서(누가 보면 내가 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겠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부탁을 하였다. 시간을 넉넉히 줄터이니 내일 오전 중으로 그 집에서 내 모든 짐을 빼라는 것과 니가 변호사이니 알아서 이혼을 해오라는 것이었다. 그게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혼을 하고 나서도 나는 내 성격이 타인과 지내지 못할 정도로 문제가 있나,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인가, 내가 정말 결혼제도에 적합하지 않은 이기적인 여자인가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가 쏟아내던 감정들이 순간 순간 떠올랐다. 그는 멀쩡한 사람인데 내가 이상한 사람이니까 그런 꼴을 당하고 이혼까지 하게 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런 생각이 반복되면서 나는 저 바닥 끝까지 침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잊고 살던 귀싸대기 구남친이 떠올랐다. 우리는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나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한 마디도 안지고 바락바락 우기며 몇 시간이고 최선을 다해 싸웠었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줄줄줄 울고 있었다. 어쩌다 그걸 본 그는 박장대소를 하며, 좀전에 싸울 때는 그렇게 자길 잡아 죽일 기세더니 남들 얘기에 애처럼 질질 짜고 있는게 웃기다고 또 귀여워 죽겠다고 난리를 쳤다.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남과 지내기 어려울 만큼 특출나게 이상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이 정도로 지내기 어려웠던 건 나도 살면서 당신들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저 이 시대를 사는 내 나이 또래의 감성과 생각을 가진 평범한 여자애였다. 지금은 21세기이지 조선시대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나인 것 자체로도, 나의 성격과 가치관까지도 충분히 사랑받고 행복할 수 있는, 또 실제로도 그랬던 사람이었다. 나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했고,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었다. 잠시나마 혹시나 내가 하자나 결격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던 것이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귀싸대기 그놈이 깨끗하게 용서가 되었다(물론 내동생은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여전히 펄펄 뛰겠지만......). 그는 적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었다. 내가 할 말을 못하고 숨어 있을 땐 나 대신 나서서 싸워 주었고, 내가 할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을 땐 뿌듯해 했었다. 자기 자신과 나를 비교하지 않았고, 진정으로 내가 잘 되길 바랐다. 내 결혼생활보다 길었던 연애기간 동안 그는 다툼의 순간에서도 항상 나의 존엄함만은 지켜주었다. 중간에 해서는 안 될 짓거리를 하긴 했지만 그는 끝까지 이 관계를 책임지려고 했었다. 손을 놓은 건 나였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순간 진심을 다해서 마음 아파했다(나는 아직도 그 커피빈을 잊지 못한다). 우린 그렇게 우리의 지난 시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인간에 대한 존중이 무엇인지 아는 자들의 민낯이었다.


나는 그렇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넘치게 사랑받고, 존중받고, 응원을 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와의 기억이 잊고 살던 나의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었다.


그는 20대의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 주었고, 30대의 나를 저 멀리 심연에서 꺼내 주었다. 고마웠다. 그리고 이제 됐다. 죽지 마라. 죽지 말고 너답게 계속해서 잘 먹고 잘 살길 바란다. 이제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그랬듯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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