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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삼숙 Feb 25. 2020

엄마 아빠, 영원한 나의 어벤져스

작년 나의 최애 드라마는 단연 <동백꽃 필 무렵> 이었다. 동백이와 용식이의 사랑 얘기도 좋았지만 가족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에피소드들이 많아서 참 좋았다.


엄마의 마음을 후벼 파며 동백이가 좋다고 날뛰는 아들에게 게살을 발라주는 용식이 엄마, 동백이를 위해서 뭐 한 가지는 꼭 한다는 동백이 엄마, 아들을 위해 잘못을 뒤집어 쓰는 까불이 아빠. 필구를 위해 용식이와 헤어지는 동백이. 많은 이들이 <동백꽃 필 무렵>에 열광을 하였던 것은 각자 자신의 부모님이 떠올라 공감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예고 없이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온 날, 새벽 6시 현관 번호키 누르는 소리에 놀란 부모님이 뛰어 나오셨다. 나는 트렁크를 손에 잡은 채 바닥만 바라보며 현관에 서 있었다. 대체 나는 몇 살까지 이렇게 뭔일이 터질 때마다 부모님이라는 보험에 기대어야 하는 것인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여서 그런가 부모님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던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아이가 되었다. 차려진 밥을 다 먹지 않으면 나가 놀 수 없었던 어린시절처럼 엄마는 내가 밥그릇을 비우는지, 잠은 얼마나 자는지 살폈고,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그동안 쓰지 않았던 내방의 온도를 확인하고 이불을 꺼내와 펴주었다. 여러모로 참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해서 잠을 꼭 자야 했기 때문에 (당시 잠을 못자서 거의 48시간 가까이 깨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약국에 수면유도제를 사러 가기로 했다. 부모님이 앞장 서시고, 나는 뒤에서 따라 갔다. 이혼한다고 짐싸들고 돌아온 딸의 약을 사러 가는 아빠의 그 뒷모습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몸을 좀 움직이는게 잠이 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우리는 약국에서 나와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우리 세 사람은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밤길을 하염 없이 걸었다. 그 길은 결혼식 전날 밤에 내동생이랑 걸었던 길이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만 두는 것 밖에 방법이 없음을. 이미 내가 그 전 해에 가방을 싸서 집에 왔을 때부터 우리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가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은 유보되고 있었다.


아빠가 출근하신 후, 나는 아빠 앞에서는 차마 할 수 없었던 이야기까지 엄마한테 털어 놓았다. 엄마, 나도 안다고 정답이 뭔지는. 근데 나 너무 무서워. 엄마가 말했다. 너는 네 일이 있고 능력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그리고 엄마 아빠가 있지 않느냐고. 우리가 오래 오래 살아서 너랑 같이 있어 줘야 하니까 앞으로 운동도 열심히 해서 건강하자고 아빠하고도 얘기 다 했다고.


나 모르게 대체 언제 그런 계획까지 세웠던 것일까. 우리는 한참을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그 때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그 결정을 후회한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다. 후회가 되는 것은 애초에 이 결혼을 하지 말 걸, 조금 더 일찍 갈라설 걸... 뭐 그 정도. 더불어 우리 부모님은 나 덕분에 필사적으로 건강하게 천년 만년 장수하기로 굳게 결의하였으니, 이건 참 내가 효녀인지 불효녀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얼마 동안은 집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평일에는 원래 밤늦게 퇴근하니 마주칠 일이 없었고, 주말에는 방에만 틀어 박혀 있었다. 매순간 너무 많은 상념들이 떠올랐고 그 흙탕물 같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책을 읽어보려고 했으나 집중이 되지 않았다. 혜민스님의 유튜브 채널을 틀어 놓고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때', '삶의 위기를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 등 다소 정직하면서도 오그라드는 제목의 영상들을 보면서 멍하니 침대에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난 원래 이런 뻔한 말하는 책이나 강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땐 정말 스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에 내리 꽂혔다).


보다 못한 아빠가 말씀하셨다.            


"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냐. 니가 무슨 대단한 결혼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얼마 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까지 할 일이냐? 별 일 아니잖아?"


신기하게도 그 순간부터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마음이 조금씩 맑아졌고,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별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아빠는 나의 정신적 지주였고, 내 삶의 지표였다. 원리 원칙주의자인 아빠는 남에게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항상 엄격했다. 자기관리의 끝판왕이자(아직도 뱃살이 하나도 없고, 태평양 같은 광활한 어깨를 유지하는 남자. 그래서 나는 모든 남자가 이런 줄 ‘잘못’ 알았다...)  내가 살면서 본 최고의 멘탈 갑이었다. 지금까지 아빠 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런 아빠가 별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 그게 맞을거다. 그렇게 나는 별 일 아닌 그 일을 별 일 없이 흘려 보내며 하루하루 살아 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별 것 아니다' 되뇌이다 보면 정말 그렇게 믿어버리게 된다. 신기한 일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아빠가 요즘 살이 너무 빠진 것 같다고 걱정을 하셨다.


"근데...... 왜? 혹시 나 때매?"

"최근에 감기 몸살 걸린 것도 있고. 아빠가 원래 표현을 잘 안하잖아. 근데 요즘에 가끔씩 그러더라고. 순간 순간 너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사실 작년부터 네 아빠가 자려고 누웠다가도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쟤는 대체 어디서 그런 놈을 만나왔냐'고 하면서 잠이 안 온다고 했거든. 아빠도 이걸 받아 들이기 힘들겠지."


별 일이 아니라더니. 어릴 적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줄 때 뒤에서 잡고 있다고 했던 그 때처럼, 아빠는 이번에도 거짓말로 내가 혼자 힘으로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당신한테 또 하나 배워간다. 돌아보면 아빠 말처럼 정말 별 것 아니었다. 자전거 타는 것도, 털고 일어나는 것도.


그리고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내가 저지른 이 별 것 아닌 일이 완벽했던 아빠의 인생에서도 가장 큰 실패이자 시련이었다는 것을.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상남자인 아빠의 약한 모습을 딱 두 번 보았다. 한 번은 6학년 때 할머니 장례식 때였고, 다른 한 번은 믿고 싶지 않지만 바로 그 때였다. 평소 같았으면 또 가슴을 치며 '나는 불효녀야ㅜㅜ' 하고 질질 짰을텐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직업정신 때문인가 아니면 쓸데 없이 책임감 쩌는 장녀의 본능 때문인가. 나는 결심했다. 아직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최선을 다해서 행복하겠노라고. 그게 잠시 샛길로 빠졌던 내 인생에 대한 보상이자, 이 엄청난 불효를 만회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엄마는 결혼하고 꽤 많은 아기를 유산했다고 했다. 그 중에는 태어났던 아기도 있었다. 당시 의학의 수준으로는 유산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엄마는 지나가는 애들만 봐도 눈물이 났다고 한다. 고생 끝에 7년 만에 품에 안은 게 바로 나다. 이런 애틋한 사연이 없더라도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들은 각별하겠지만 그래서인지 우리는 더욱 특별하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태어 났다면 내 언니나 오빠가 되었을 그들의 몫까지 내가 짊어지고 살아가기 때문인걸까. 아마도 우리가 함께 보낼 시간이 다른 모녀들에 비해서 조금 더 길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나를 간절히 기다려 온 그 시간의 깊이 만큼.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해서 회의를 하고 서면을 쓰고 재판을 가고 가끔은 회식도 가고. 그렇게 살았다. 피고용자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 머리를 식힌다거나 어딘가에 쳐박혀 마음껏 울며 슬픔을 만끽하는 건 드라마에서나 존재하는 사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가차없이 굴러가는 일상이 오히려 나를 살렸다.


요즘 엄마는 아침마다 롤러 형태로 된 테이프 먼지 제거기(다이소에서 팝니다)를 들고 나를 쫓아다니며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문질러댄다. 내 옷은 전부 장례식 룩(검정, 회색의 정장들)이라 먼지가 굉장히 잘 보이는데, 엄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까지 다 빨아들일 기세로 내가 머리를 말리고 있거나 화장을 하고 있을 때 등이고 엉덩이고 할 것 없이 마구 문지른다. 이혼하고 후줄근하게 다니면 사람들이 흉본다나. 사실 내가 가장 후줄근 했던 때는 결혼해서 살던 때였는데(빨아 놓은 스타킹이 없어서 맨발로 일단 나가 출근길 편의점에서 사 신는 것이 다반사였고, 세탁소 아저씨를 만날 시간이 없어서 옷은 항상 꾸깃꾸깃...). 엄마는 그렇게 아침마다 먼지가 박멸된 옷을 입고 출근하는 나를 뿌듯하게 바라본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처음엔 눈치가 보여서 설거지도 하고 걸레질도 하고 했는데......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침에 깨우면 짜증내고, 밥 먹으라고 몇 번이나 소리쳐야 방에서 기어나오고, 내 방 청소도 안하는 원래의 딸로 금방 다시 돌아왔다. 관성의 법칙이란 참 무섭다. 헤아려보니 내가 집을 떠났던 기간은 2년 남짓이었다. 잠깐 군대에 다녀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인생공부 제대로 했던 시간이었지만 절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래도 생애 최초로 아이돌 몸무게를 찍어도 보고. 나름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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