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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Mar 03. 2024

가까운 천국

마지막 글을 쓴 적이 언제인가 돌아보니 2월 1일이네요. 개인 공간에라도 며칠에 한 번 꼴은 꼭 글을 써서 올리곤 했는데, 단 한 단어도 쓰지 못한 채 한 달이 흘렀습니다. 잃어버린 나의 2월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 악재가 겹치며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이 살았던 시간인데, 그 또한 다 지나가버리네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익명이라 해도 개인적인 힘듦을 인터넷에 속시원히 털어 놓는 성격은 못 되어 글로 밝힐 수 있는 것들만 일부 밝히며, 살아온 이야기, 깨달은 이야기를 글로 알알이 꿰어 아름다운 물건으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아무리 힘들게 깎은 구슬이라해도 모아 놓으면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버리니까요. 그 작업이 참 좋아 저는 글을 사랑합니다. 




가까운 천국



이 글은 한 달 동안 꾸준히 써온 글이다. 한 번도 타자로 글을 친 적은 없지만, 머릿 속에서 끝없이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글의 얼개를 짜갔다. 2월 동안 내가 겪어 온 일들, 내가 해내온 일들을 모두 모아보니 또렷하게 떠오르는 표현이 있었다. 


'가까운 천국'


내가 그동안 다녀온 Y학교는 나의 이름을 무려 8년 동안 품어 주던 학교이다. 아기 낳기 전 2년, 아기를 낳으며 쉰 3년, 복직 후 3년의 시간을 지낸 학교. 실제로 있었던 시간은 5년이지만, 이 학교의 여러 교직원과 아이들은 내가 아주 오랫동안 이 학교에 있었던 것만 같았다 한다. 나에게도 꼭 그렇게 느껴진다.


2년 동안 교무부장으로서 살았다. 처음 하는 교무이다보니 업무적으로 무지한 면이 많았고, 하루 하루 오늘은 어떤 일이 갑자기 터져서 나를 당황케 할까라는 생각에 긴장될 때도 다반사였다. 매 순간 정신을 또렷하게 차리기가 어렵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지만, 마음 속에 원칙 몇 가지는 세웠다. 


"적어도 내가 이 학교에 있는 한 이 교직원 중 그 누구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자."

"친절함은 그 어떤 순간에도 옳다. 오가는 모든 이에게 친절하자."


좋은 교무였다고 말할 순 없다. 그건 내가 판단할 것이 아니니까. 그래도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 세웠던 원칙만큼은 철저히 지키려 매 순간 노력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교무의 삶은 바쁨에 쫓겨 마음의 여유를 찾기 어렵기에 원칙을 지킨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숨 한 번 크게 쉬고 자꾸만 마음을 고쳐먹었던 거 같다. 

전체 송별회를 마치고 선생님들과 마지막 술자리를 가졌다. 누구도 마지막을 의식하지 않으려 빙빙 둘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헤어질 무렵, 막내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저는 2023년 9월 4일은 정말 못 잊을 거 같아요."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각자 서로의 마음을 털어 놓지 못한 채로 우리는 한 교실에 모였었다. 서로의 패를 알 수 없으니 한 사람씩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로 했다. 


"각자의 의견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저는 후배 선생님들을 위해 교직사회가 이번 일을 계기로 개선되어야 한다 생각해요. 저는 9월 4일에 연가를 내겠습니다. 선생님들이 어떤 결정을 하시든 저는 그냥 제 신념대로 행동할게요."


교무로서 첫 발언의 책임을 맡았던지라 무겁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 다음 이어졌던 선생님들의 이야기는 강경파, 온건파로 나뉘기는 했지만, 모두가 9월 4일을 순순히 넘어갈 순 없다는 이야기로 모아졌다. 그 이후의 일들은 그린티에 여러 글로 남겼던 것처럼 2주 정도의 의견 조율 과정을 거쳐 결국 우리 모두 재량휴업일이 아니라면 연가를 내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학교 교원이 관리자를 제외하면 총 9명인데, 그 누구의 의견도 소외되지 않도록 우리는 끊임 없이 모여서 반복하여 이야기했다. 어느 한 쪽 편을 설득하려 모이는 건 아니였다. 어떻게 하면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우리의 신념을 지켜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함께 끝없이 해나갔던 것 같다. 


사실 이제 와서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에게는 그 모든 일이 큰 스트레스였다. 정답이 없는 토의들을 계속 열어야 했던 것, 교무부장으로서 관리자와 맨 앞에서 대립해야 했던 것. 하루도 편하게 잠든 날이 없을 정도로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던 날들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때의 내가 느꼈던 고통, 동료들이 함께 감내해야 했던 고통들이 단순히 9월 4일 멈춤의 날 성공을 위한 고통만은 아니었다는 걸. 이제 와서 함께 이야기하며 돌아보니 그것은 성장통에 가까웠다. 더이상 이렇게 하라는 대로 하며 살지 않겠다는,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 개인으로 구분되어졌던 우리가 하나로 융합되어 서로의 알을 깨고 껴안는 고통.


"저는 그때 선생님들이 정말 가깝게 느껴졌어요. 그때 이후로 저는 무슨 협의를 해도 우리가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깊이 이해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막내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우리가 서로에게 보여주었던 밑바닥은 서로를 향한 신뢰를 만들었고, 그 이후의 모든 협의는 언어적인 것만이 아닌 비언어적인 것들도 한 몫을 하는 회의였으니까. 


삶은 고단하고, 우리에게는 천국이 필요하다. 죽음 이후의 천국은 너무 먼 이야기이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주 가까운 천국. 언제든 뛰어들 수 있는 서로의 마음이란 가까운 천국이 필요하다. 이 학교에 머물며 내 곁에 있었던 천국들. 나 모르게 조용히 나의 업무를 몰래 하고 통보만 해주던 천국이 있었다. 늦은 밤까지 일하느라 고단했던 나에게 수고했다며 커피를 내밀던 천국. 이제 다른 학교로 떠나더라도 반드시 계속 만나야 한다며 학교 단톡 나가자마자 모임 단톡방을 만들던 천국들.


가까운 천국이 있기에 숨쉴 수 있었고, 나 또한 누군가의 천국이 되어줄 수 있어 가치로운 삶의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새로운 학교.


한 지역에 너무 오래 있었던 걸까. 새 학교 발령이 나자마자 내가 여러 지인들에게 들어야 했던 소리는 긍정의 소리보다 부정의 소리였다. 


"00선생님을 정말 사람을 어렵게 하지.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어."

"00직원은 모두에게 미움 받아. 그렇게 미움 받기도 쉽지 않을걸. 왜 그러나 몰라."


물론 간간히 좋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대부분이 몇몇 눈에 띄는 사람들의 욕이었다. 새 학교에 대한 기대보다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다. 사람들의 말을 떠나 혼자 조용히 생각을 해보니 달라진 건 없었다. Y학교에서나 새학교에서나 결국 나는 누군가의 가까운 천국이 되어주고 싶다. 또한 내 가까이에 있는 천국들에게 매일 새롭게 고마워하는 사람이고 싶다. 


언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존중하기는 쉽습니다."


모두를 사랑으로 품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 부담스럽다. 하지만 모두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친절할 수는 있을 거 같다. 설사 전혀 친절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의 영혼에게는 무례함보다 친절함이 더 좋은 것이니까. 나를 위해서 철저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친절하고 싶다. 


나의 2024년은 어떤 해가 될까. 알 수 없다. 안타깝게도 생각지도 못한 힘든 일들이 또 여기 저기에서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 삶은 원래 그런 것이었으니까.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들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 친절하자. 그렇게 나만의 천국을 지켜가자.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천국이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숨과도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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