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빗소리 Mar 16. 2024

쓸모 없는 것들


쓸모 없는 것들



쓸모 없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새학교, 새교실에 오자마자 노오란 프리지아를 꽂아 놓았습니다. 들어오는 아이고, 어른이고 모두 묻습니다.



"생화예요?"


"왜 꽃을 사놔요?"



생화 맞습니다. 생화만 좋아합니다. 길어야 일주일도 채 못 가는 여린 것들이지만, 찬란하게 피었다가 미련 없이 떠나가는 약속된 이별이 좋아서 꽃을 삽니다.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같은 얼굴을 가진 채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조화들은 오히려 제게 섬짓함을 느끼게 합니다.



별을 바라보는 것을 기뻐하고, 커피향 한 움큼 맡는 것을 사랑합니다. 휴일 아침 7시부터 줄을 서서 먹어야 하는 빵집에서 하염 없이 기다리다 얻는 딸기파이를 입에 문 순간도 좋아합니다. 마치 입 안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그 화려한 맛은 다음 휴일의 부지런함을 예약하게 합니다.



좋아하는 음악은 똑같은 곡을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듣습니다. 그렇게 장렬하게 나의 장기 기억소에 각인된 음악은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줍니다. 어릴 때는 아빠의 LP판을 통해, 지금은 나의 스마트폰을 통해. 그렇게 음악은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여 저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습니다. 저란 사람은 그동안 제가 들었던 음악의 총합이고, 몸을 입은 음악입니다. 음악이 저의 음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귀엽고 예쁜 것들을 좋아합니다. 먹고 사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것들은 아닌지라 살 때마다 이런 걸 사도 될까라는 의문이 들곤 하지만, 사둔 물건들을 지나다니며 흘긋흘긋 볼 때마다 마음이 다정해지곤 합니다. 귀엽고 무용한 녀석들. 제 책상에는 그런 녀석들이 여럿 있습니다.



두 명의 낭만주의자 사이에서 태어난 저는 무용한 것들을 넉넉히 허락 받으며 자랐습니다. 허락을 받았다기 보다는 무용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교육 받으며 자랐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늘 대책 없이 낭만적인 나를 믿을 수가 없어 실용주의가 강한 집안에서 자란 남편을 만났습니다. 몇 년간 진통이 심했습니다. 생필품을 채워 놓듯 꽃을 꽃병에 꽂아 놓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와 가장 쓸모 없는 선물이 꽃이라 생각하는 남편 사이의 간극은 무척 컸습니다. 꽃은 작은 일이었고, 생활 전반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상과 현실이 되어 끝없이 부딪혔습니다.



그런 일들이 아팠고 피곤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어쩌면 그 시간들은 늘 하늘을 향해 발이 붕 떠버리는 제가 땅에 발을 붙이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고유성을 침해 받지 않고 유리관 속 장미처럼 살아가는 방법이 있지만, 다가오는 변화와 낯섬과 치열하게 다투면서 그 다툼의 산물들을 또 다른 나로서 받아들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유리관 밖을 나온 장미는 어디에서든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니까요.



두 낭만주의자들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저는 좀 더 진화한 낭만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예쁜 꽃을 사기 위해 시간을 고르며 참다가도 내가 좋아하는 꽃의 계절이 되었을 때는 가격과 상관 없이 서슴 없이 사버리기도 합니다. 현실을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이상을 이루어야 하는 순간에는 현실의 스위치를 서슴 없이 꺼버리는 것처럼.



제 딸은 어떻게 클지 궁금합니다. 주양육자가 낭만주의자라 어김 없이 낭만주의로 크고 있는 제 딸이지만, 냉정한 현실 인식과 거침 없는 이상 쫓기라는 두 마리 토끼 사이에서 저보다는 덜 헤매길 소망해봅니다. 무용한 것들의 소중함을 늘 간직하며, 마음이 추운 날에는 그 무용함에 기대 하루를 보냈으면 합니다. 때론 현실을 위해 잠시 무용함의 페이지를 접어둔다 해도 언제라도 다시 펼 수 있는 유연함도 있길.



지난 5~6년의 시간은 어쩌면 제 삶에서 완전히 도려내버렸으면 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한 번 정도 겪어도 힘들겠다 싶은 일들이 제게는 사정 없이 몰아치는 시간들이었으니까요. 그런 시간을 겪고도 마음의 병이 없었던 것에 대해 저는 오래 생각했습니다. 제 자신만 보자면 그렇게 강인하지도 않거든요. 어쩌면 그런 시간을 보내며 제 마음의 한 쪽을 받쳐주고 있던 것 그런 수많은 무용하고 무해한 것들이지 않았을까. 순간순간 웃는 웃음이, 느끼는 안도감이, 마음을 간질이는 귀여움들이 작게 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그 작은 위로들이 모이니 커다란 기둥이 되어버렸네요.



무용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습니다. 가수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피씨방에 가서 예약을 하는 마음,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기다란 줄을 기다리는 마음, 좋아하는 그림을 보기 위해 먼 길을 기차에 오르는 마음. 그 모든 마음들을 넉넉히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 나이 들어 가려 합니다.



오늘 누리는 당신의 무용함은 무엇인가요. 그 무용함 안에 평안과 행복이 깃들기를 기도해봅니다.






실수하며 살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 살았습니다. 1등을 해야 되고, 실수하면 안된다는 틀 안에서 살았어요. 하루 하루가 숨이 막히고 허덕였는데도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만들어진 틀이란 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지금도 그러한 기운들이 무의식에 짙게 깔려 있는 것을 느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합니다. 마치 줄에 매인 코끼리가 줄이 없어져도 원래의 영역 안에서만 맴돌 듯.



자주 불안해집니다.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니까요. 학교를 옮기거나 학년을 옮기게 되면 꼭 물어봅니다. 함께 일해야 할 분들의 평판에 대해. 인간관계 안에서도 실수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모두가 별로라는 사람을 적당히 피하고 싶어서.



이번에 학교를 옮기면서는 평판 묻기를 그쳤습니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의 평판이 좋든 나쁘든 온몸으로 부딪혀 보자는 생각을 했거든요. 대체 그 실수가 무엇이 무서워서 그래. 설사 그 사람이 별로여도 내가 부딪혀가며 실패하고, 불편함을 느껴보자. 그런 생각들을 하니까 더이상 평판이 궁금해지지 않았어요. 또 사람은 묘한 존재라 모두에게 별로인 사람도 하나 두 개의 코드가 저와 맞아도 저랑 어우렁더우렁 지내기도 하는 경험을 겪어보기도 했으니까요.



실수해보자는 생각을 합니다. 1등 말고 꼴등이어도 상관 없으니까 그냥 해보자 마음 먹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건 큰 변화예요. 제 마음 속의 경주마는 자연스레 다음 경기를 준비하곤 하니까요. 이건 경기가 아니고, 그냥 경험이라는 놀이라고 생각해봐요. 실수한다는 게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그저 약간의 불편하고 창피한 시기만 거치면 되는 거라 생각하니 살 거 같아요.



모든 것에 완벽을 기하던 옷을 벗고 저는 좀 더 맨몸으로 세상을 느껴보고 싶어요. 부서지고 깨지고 때론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괜찮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요. 제 나이 42살. 저는 이제서야 생의 걸음마를 떼는 기분으로 살아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까운 천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