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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는 일을 좋아합니다.
마음이 산란할 때.
일상 속에서 나의 모서리가 닳아버린 것 같을 때.
더이상 힘내고 싶지 않은 아침이 다가올 때.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납니다.
가족과 친구와 직장,
내가 몸 담고 나를 감싸는 나의 마을로부터 멀리.
그렇게 멀리 달아나서
모든 것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다 보면
다시금 평범한 것들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금요일, 홍대의 늦은 오후.
내가 사는 작은 시골 마을과 달리
젊음의 싱그러움과 바쁨이 가득한 곳에
살며시 나를 옮겨 놓습니다.
이곳에 오기 위해
운전을 하고, 기차를 타며, 지하철을 타고,
한참를 걸어야 도착합니다.
그 번거로움과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한 용기,
그 모든 걸 거쳐야
이곳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용기는 이곳으로 도착하는
진정한 티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조퇴를 냈을 때
가는 길을 오붓이 바래다 주던 교감선생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혼자 가?”
“네.”
“부럽다.”
“왜요? 교감선생님은 (자녀도 다 장성하였으니) 언제든 혼자 가실 수 있잖아요.”
“난 용기가 없어.”
시간이 없는 어려움보다 용기를 내야 하는 어려움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다른 어려움이 있구나. 50년 넘게 혼자 어딘가로 훌쩍 떠나본 적 없는 분께는 그 자체가 큰 허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혼자 여행을 하다보면 외롭고 쓸쓸할 거라 생각이 들테지요. 맞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것은 당연한 감정이지요.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 외롭고 쓸쓸함이 지난 뒤에 오는 또다른 감정들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생각해요. 고요함 속에서 점점 또렷해지는 내 마음 한 켠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감정들. 그 감정들의 실루엣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혼자일 때 가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의 제약 없이 낯선 거리를 헤매봅니다. 적당한 식당에 들어가 건강한 샐러드를 천천히 씹습니다. 평소에는 저녁에는 허락되지 않던 커피를 마시며, 창밖 풍경을 하염 없이 바라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비로소 자유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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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날 모르는 거리에서는 속박을 벗어 던지고 자유롭게 입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새빨간 크롭티를 입고 왔는데, 탱크탑과 끈나시로 뒤덮인 홍대 거리를 보니 저는 평범하네요. 제가 사는 시골 마을과 저의 작은 학교는 이런 빨간티 하나만 입어도 지나가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인걸요. 다음에는 끈나시를 입고 아무도 날 모르는 거리를 활보해보자며 주먹을 불끈쥡니다. 모르는 거리에서 내가 아닌 나로 살아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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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책이 제게 주는 기쁨이 정말 큽니다. 저는 문장애호가입니다. 귀한 문장을 만나면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으며 마음 속에 꼭꼭 담아 놓습니다. 문장을 담은 날은 하루종일 배가 부른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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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요몇달간 우연히 잡은 책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프랑스나 파리와 관련된 책들이었습니다. 백수린, 신유진, 김민철. 그녀들의 책은 모두 우연히 내게 왔고, 한결 같이 프랑스와 파리, 예술의 아름다움을 제 마음에 묻히고 떠났습니다. 결정적으로 스텔라장의 프랑스어 노래를 공연에 부르기 위해 프랑스어를 외우며, 프랑스어에 대한 제 오랜 마음이 툭 건드려졌습니다.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언어에는 각자의 질감이 있다 생각합니다. 한국어에는 시작할 때의 마음인 훈민에 대한 마음이 담겨 쉽지만 깊음이 느껴집니다. 프랑스어는 섬세하고 아름답게 느껴지곤 합니다. 물 흐르듯 말하는 그 언어를 입에 담다보면 제 삶의 방향도 왠지 더 뜻하지 않은 곳을 향해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목표 없이, 시험이나 자격에 대한 생각도 없이 순수하게 언어가 좋아 배워보는 건 처음입니다. 부담 가지지 말고 아주 조금씩 그러나 성실히 배우며, 언젠가 파리의 어느 거리를 헤매며 지금처럼 샐러드를 먹고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저를 꿈꿔봅니다. 낯선 곳의 내가 벌써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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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편지를 우편으로 보냈다는 친구의 말에
며칠 전부터 저녁마다 딸과 손을 잡고
우편함을 확인하러 갑니다.
딸에게 확인할 기회를 주고 기다립니다.
편지 있어?
없어.
다행이다. 내일 또 기다릴 수 있잖아.
도착함도 기다림도 다 좋아.
친구의 편지를 기다리며
나도 누군가에게 이 기다림을 선물하고 싶다 다짐합니다.
다시금 손편지를 시작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