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의 일기
- 눈 감는 것을 자주 무서워하는 내게는 글을 쓰는 것이 또다른 기도가 된다. 내 삶의 모든 순간들에 감사하고, 그분의 돕는 손길을 느끼는 것. 감사일기를 쓰다보면 미처 몰랐던 삶의 비밀을 알게 된다. 나의 침대에 눕는 밤이면 마치 내가 내 삶이란 무대 속에서 열연하다가 무대 아래로 돌아온 사람으로 느껴지곤 한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힘듦과 즐거움을 뚫고 어둠은 가고 해는 밝아온다. 해가 항상 그 자리에 다시 뜬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엄마 돌아가신 뒤의 기간 동안 매일 자다가 죽기를 바라며 잠들었는데, 다음 날 해는 무심하게 떠있었다. 그게 그렇게 얄밉고, 그렇게 안도가 되었다.
뭐라 딱히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요즘의 시기는 여러 가지로 내 마음이 불편하고 어려운 시기이다. 뜨고 지는 해처럼 변함 없이 날 위로하시는 그분에게 감사하며 이 성장통을 딛고 무소의 뿔처럼 담담히 가자.
- 룡맨과 진이(모두 가명)이 놀러왔다. 그녀들은 나의 대학교 동기이다. 가장 친한 친구들인데 감사하게도 모두 한 시간 거리에 산다. 아침부터 케잌 만들기 수업, 오후에는 대여형 키즈카페를 돌며, 아이들을 데리고 신나게 놀았다. 7, 6, 3세에 나이도 다르도 성별도 다른 아이들이라 그다지 함께 어울리진 못했으나 그래도 엄마들이 즐겁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다음 주말에는 함께 산속 숙소를 잡아 놀기로 했다.
대화하다가 한 친구가,
“요즘 급작스럽게 죽는 사람 많은데, 우리도 우스개소리로 누구 하나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23년 동안 부모님들이 한 분씩 돌아가시는 비극을 같이 겪기도 함) 얼굴 자주 봐두자.”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어쩐지 울고 싶었다. 우리 중 누구 하나라도 없는 삶은 왠지 나머지 둘에게 너무나 큰 비극이니까.
최근 새학교에서 몇몇 상식 없는 사람들과 일하며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꼈는데, 오랜만에 만난 내 친구들과 있으니 ‘맞아, 이 느낌이야!‘라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내가 먼저 베푸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그러나 우리 모두 누군가의 베풂에는 마땅히 돈쭐내며(돈으로 혼쭐내준다는 신조어) 복수(?)하는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내가 좀 손해보더라도 손익을 따지지 않고 친구들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
귀찮고 힘들어도 내 몸 좀 더 움직여 친구들의 쉼을 보장해주는 사람
내 친구들은 그런 애들이었다. 살면서 이들에게 받은 배려와 선물이 많다. 이들이 내 삶의 가장 큰 감사 목록이었음을 돌고 돌아 이제야 깨닫는다. 아마도 이상한 인간들을 만나 지치는 건 내 곁의 소중함을 환기 시키는 좋은 동기가 되는 거 같다.
친구들과 보낸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예린이에게 한결같이 자상한 그이들의 마음이 예린이에게는 좋은 보약이 되었을 걸 믿는다.
-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에서 집에 들어와 씻고 졸면서 연수를 들었다. 이렇게라도 시험을 잘 보겠다는 의지를 태우는 내가 너무 대견해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점수를 떠나 올해는 시험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나를 응원해주고 싶다. 워킹맘으로 고단하게 살면서도 꿈꾸기를 주저하지 않는 내가 나는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