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6학년 선생님께서 공가로 못 오셔서 보결을 들어가야 하는 날이었습니다. 전담이어서 혼자만의 조용한 아침 시간을 보냈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다른 반을 맡아야 하니 긴장이 되는 아침이었죠. 6학년 교실로 올라 가니 아무도 없습니다. 대체 어디로 도망갔나 궁시렁대며 있는데 세영샘(가명)에게 카톡이 옵니다.
“선생님, 6학년들 주차장 앞에서 다 어슬렁거리고 있는데요? 샘 기다리고 있더라구요.”
6학급 규모의 작은 학교라 모든 아이들과 친구 같이 지냅니다. 과학, 영어 전담인 저는 3~6학년 아이들을 매일 보는데, 특히 시수가 많은 6학년과는 더욱 절친입니다. 아마도 담임샘이 내일 전담샘이 너희를 하루종일 돌보실 거라고 미리 말하신 거겠죠. 좋아서 기다리는 녀석들이 귀엽고 웃겼습니다.
글과 달리 실제 성격은 유머를 매우 사랑하는 편입니다. 고학년 아이들과 드립치는게 취미라면 취미인데, 6학년 여자 아이들과 쿵짝이 잘 맞는 편이에요.
“야, 너 진짜 면도 좀 해.”
“아, 왜요.”
“너 양심에 털이 무성하니까 ㅋㅋㅋ”
“아, 쌤!!!!!”
“쌤, 오늘 제가 개 좋아하는 방송 하는 날이에요. 히히“
”뭐, 시크릿 쥬쥬?“
“아 쫌! 아니라고요!!”
하도 서로 드립을 쳐대니까 정이 들었는지 거의 쉬는 시간마다 찾아오는 녀석들입니다.
그날도 그녀석들이었겠다 싶어서 별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세영샘이 오늘 점심에 웃으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아니, 연우(가명) 그녀석이 그럴줄 몰랐다니까요. 샘 그날 기다릴 때 신나서 흥분 상태인데, 그녀석 그런 거 처음 봐요. 너무 귀여웠어요.“
”연우가요??“
의외의 인물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게 놀라웠습니다. 연우는 우리 학교 6학년의 시크 보이 남학생이거든요. 항상 심드렁해보이고, 까불거리는 아이들 사이에 잘 안 끼는 모범생 연우가 왜 거기에 있었을까 의아했습니다.
“연우가 선생님 좋아하는 거 같아요. 그렇게 주차장까지 나가서 기다리는 건 처음 봤거든요.”
연우가? 기억이 시계를 자꾸만 예전으로 돌립니다.
쉬는 시간마다 주변을 맴맴 돌며 내 공문의 제목을 자꾸 읽는 연우에게 그만하라고 했던 기억. 아마도 주변에서 더 설쳐대는 여자애들 등살에 연우를 쳐다보지도 못했던 거 같습니다.
월요일 1교시에 의례적으로 묻던 ‘주말에 뭐했니?’ 질문에 ‘게임했죠 뭐. 샘 주말에 같이 피씨방 갈래요?’라고 받아치던 녀석. 이놈들이 게임으로 도발하나 싶어서 ’야, 나도 왕년에 메이플 만렙이었거든??‘이라고 뻐기며 끝냈는데 생각해보니 그 질문도 연우가 한 거였네요.
6학년 보결 수업을 들어갔을 때 아이들과 티볼을 하는데, 1루에 있던 녀석이 제가 서있던 3루로 포지션을 바꿔서 오길래 그런가보다 했던 기억. 옆에서 계속 말을 시켰지만 게임 지켜보느라 대답을 하는둥마는둥 했었는데, 갑자기 미안해집니다.
항상 어기적 거리며 과학실에서 제일 늦게 가던 녀석에게 다음 수업 준비해야하니까 빨리 가라고 몰아내던 저였는데….이제 와서 생각하니 정말 미안한게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이것저것을 저에게 몇 번 줬던 것도 같은데, 뭘 줬는지도 기억이 안나는 이 나쁜 샘이라니…..
매일 심드렁해보이니까 저도 같이 심드렁하게 대해줬는데, 이런 저런 기억들을 되돌려보니 비로소 연우의 마음이 보이더라구요. 풋풋하고 귀여운 마음이.
“그러게요. 연우 진짜 귀엽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저 마음 자체가 빛나고 참 예쁜 거 같아요.”
세영샘과 연우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푸르고 어여쁜 마음을 바라보며 함께 웃었습니다. 나에게도 있었고, 세영샘에게도 있었기에 더 소중한 그 마음들. 봄처럼 갑자기 찾아오고 끝나도 그 끝이 언제인지 아리송했던 한때의 감정들. 그래서 더 소중하고 귀여웠던 10대의 이야기들.
연우는 알까요. 자기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엄마와 몇 살 차이도 안난다는 사실을. 친구 아들들이 다 중학생인데 말이에요. 연우를 보면 그저 엄마 미소만 나오다는 걸.
엄마의 마음으로(?), 녀석을 스승으로서 아끼는 마음으로…. 그 호감을 발판 삼아 더욱 더 채찍을 가해 영어 공부를 빡세게 시켜 중학교로 올려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이 생각을 입으로 말했다면 나의 어린 13살 친구들은 또 이렇게 외치겠죠.
“선생님, T예요??(정색)”
초등학교 교사라 이런 재밌는 일도 종종 생기는 거 같아요.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우리 엄마 또래인지도 분간 안되는 아가들이라…. ㅋㅋㅋㅋㅋ 그래도 그 마음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뭐라도 자꾸 해주고 싶어요.
이런 저런 대화 끝에 세영샘이 말합니다.
“아이고, 우리 빗소리샘 2월에 애들 보낼 때 질질 자겠네.”
맞아요. 속절 없이 정을 줘버려서 진짜 울 거 같아요. 그런 세영샘에게 저는 마지막으로 외쳐봅니다.
“샘, T예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저는 5학년 때 처음 가져봤던 감정이에요. 그때 당시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너무 떨어져서 거울 보기를 싫어했어요. 왜인지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는 외모에 대해 큰 불만이 없었는데 말이죠. 제가 짝사랑했던 남자 아이에 비해 한참이나 떨어지는 거 같은 제 자신이 부끄럽고, 제 감정이 누추하게 느껴져 감추기만 했던 거 같습니다. 그 아이는 또 왜이리 반짝여보이고, 높아만 보였는지.
지나고나니 알 거 같아요. 그때 가장 반짝였던 건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했던 제 영혼이었다는 것을요. 그 아이를 생각하고, 그 아이의 주변을 몰래 맴맴 돌았던 제 마음들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어요. 그 순수함이 얼마나 고운 건지도요. 제가 좋아했던 건 정말 그 아이인 걸까, 그 아이를 좋아하며 변화되고 있는 내 감정 그 자체였던 걸까. 사실 아직도 정답은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누군가에게 그렇게 아무 조건 없이 뛰어들었던 건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마음이라는 거죠.
연우를 바라보며 저는 어릴 때의 제 자신을 떠올립니다. 알고보니 곱고 아름다웠던 그 마음들을요.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한 나의 마음을 꺼내 보듬습니다. 지금이라도 꼭 안아주고 매만져서 다시 넣어 놓아요. 생각날 때마다 꼭 안아주자 다짐하면서요.
교사가 되고 싶어 된 것은 아니지만, 제자들을 보며 저는 어린 제 모습을 자주 떠올리고, 슬프고 힘든 순간이었던 아이의 기억을 꺼내어 매만질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덕분에 허술했던 제 마음의 벽돌들이 조금씩 채워지고 더 단단하게 세워지는 거 같아요.
우는 일을 걱정 말고 실컷 사랑하고 아껴주다가 많이 아프겠습니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아픈게 인생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인 것 같아서요.
https://youtu.be/-T68X4GOLVM?si=qUPzLXVGh7PvsWC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