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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Oct 24. 2024

앉아요, 내 이야기 안 끝났어요

어제 선배를 들이 받았어요.


지난 글에 등장했던 교무부장님입니다. 참은 세월을 돌아보면 8개월 정도 되어가네요. 분노가 점점 쌓이던 순간을 일일히 말할 수도 없을만큼 그녀와 저는 완전히 결이 다른 사람이지만, 불의와 무례함을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저는 매일 같이 봐야하는 그녀가 참 싫었습니다. 가장 열받는 건 그녀의 말투였어요.


"시간 남으면 이것 좀 해줘."

"자기, 시간 많지?"

"한가하면 이것 좀 부탁해."


세상에..... 한가한 교사가 얼마나 될까요? 더군다나 저는 7살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인걸요. 그녀가 그렇게 오해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제가 교담이라는 것 정도입니다. 하지만 교담을 해보신 선생님은 아시겠지만, 교담이 해야할 일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수업시수도 많을뿐더러 저 같이 작은 학교 교담은 3~6학년 영어, 과학 수업을 1회용으로만 준비하다보니 일주일에 수업 22시수를 쌩(?)으로 준비한답니다. 정말 육아시간 안 쓰고도 머리털 흩날리게 뛰어다녀야만 수업 준비를 다할 수 있어요. 또 한 가지 걸리는 점은 그녀는 매우 편협한 생각을 가진 자로서 교무 외의 사람은 모두 한가하다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제가 느낄 때에는요. 저는 다양한 위치(1~6학년과 교담 및 계속 바뀌는 업무)에 있던 사람으로서 그 어느 학년 하나, 그 어느 업무 하나 절대 한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열심히 할라치면 모든 학년, 모든 업무가 어려운 것이죠.


어제도 그녀의 이 말이 저의 트리거가 되었습니다.


"자기, 시간 많으면...."

"저 시간 없어요!"


버럭 소리 질렀습니다. 교무부장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저와 10살 정도 차이 나는 선배이니까 한참 어린 후배한테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거에 어이가 없었겠죠. 그녀가 부탁한 건 2025년 초에나 해야할 일이었어요. 말도 안되는 거죠. 본인이 필요하니까 저를 채근하는 거예요.


"저 시간 없고요. 그런 일 지금 하고 싶지 않아요. 만약 제 업무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저는 2025년 겨울 방학 때 할 거예요."


그때 3년차 저경력 후배 선생님이 같이 들어오셨다는 걸 잠시 잊었어요.


"준혁(가명)샘에게 원래 부탁했었는데, 방법을 모르겠다고 해서 선생님한테 온 거야. 선생님 지난 번에 이 일 해줬는데 방법 알잖아."

"알아도 지금 하고 싶지 않다고요.(계속 격앙된 목소리로) 이거 준혁샘한테 시키신 거라고요? 제가 거절하면 또 준혁샘한테 가는 거예요?"


후배 앞에서 계속 버럭버럭 두 선배가 싸우고 있으니 후배샘이 몸둘바를 몰라합니다. 그분 때문이 아닌데.... 어찌되었거나 지금은 싸워야 할 때라 저는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평상시와는 다른 저의 모습에 그녀는 제 교실에서 일단 후퇴했어요.


저는 내노라 하는 순둥이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요. 그래서 무례한 행동이나 불의한 행동을 가끔 당하기도 해요. 왜냐하면 생각이 너무 느려서요. 집에 도착해서야 제가 기분 나쁘다는 것, 그 사람이 매우 무례했다는 것을 눈치채거든요. 바보 같이 당할 때가 훨씬 많아요. 바보 같이 눈치를 못 채니까요. 그러나 저에게 있는 반전은 이게 빌드업이 되면 엄청난 헐크로 변신한다는 겁니다. 쌓이고 쌓이다 트리거 하나로 터지는 거죠.


"야, 나 오늘 교무부장 들이 받았어."

몸 속 깊은 곳까지 나쁜 놈은 아니라 남에게 돌을 던져놓고 제 마음이 그리 시원하지만은 않죠. 괜히 헛헛한 마음에 밤이 되자 20년지기 친구들 단톡방에 톡을 올렸습니다.


"너를 화나게 할 정도면 그놈이 무조건 나쁜 놈이야."

"잘했다. 참고 이불킥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저를 저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다이애나처럼 착한 앤데, 나의 다이애나를 그리 열받게 하다니."

"차홍 칭찬짤 보고 이거 완전 빗소리다 생각했는데, 나의 차홍이가 오늘 또라이가 되어버렸구나.. 나의 차홍이..."

"내 친구가 이렇게 걸크러시야."


울다가 웃으면 털이 나는데, 친구들의 유머에 울다가 웃음이 터졌습니다.

맞아요. 순둥이인 저를, 참고 참다가 마지막에 터지는 저를 열받게 하다니 그놈이 나쁜 놈이죠.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후배 선생님에게 메시지를 보냈어요.


"선생님, 정말 미안해요. 이 학교 사람들 중 앞으로 가장 오래 일할 샘에게 제일 잘 보이고 싶은 저인데...(이분은 올해 저의 발령 동기임) 제가 사실 교무부장님한테 쌓인게 너무 많았어요. 남일 시키기를 좋아하는 분이라 기분 나빠하고 있었는데, 어제는 좀 그게 쌓인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불의를 못 참거든요. 만약 선생님이 불의한 일을 당하는 일이 있다면 저 가만 있지 않을게요."


후배 선생님은 답을 주셨어요.


"선생님, 괜찮아요. 조금 놀라긴 했어요. 저한테는 항상 천사 같으셨는데, 갑자기 막 소리 지르시는 모습을 처음 봤거든요. 사실 저도 교무부장님이 요새 저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키셔서 많이 속상했어요. 그런데 저는 은근히 소심해서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했어요. 저는 오히려 그렇게 선생님의 목소리를 내시는 모습이 부러웠어요. 저도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선생님, 힘드신 일 있으면 제가 다 도와드릴게요. 항상 잘해주셨으니까 선생님 일은 도와드릴 수 있어요."


후배 선생님 메시지에 또 갑자기 격앙되는 감정을 조금 가라앉히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요. 만약 또 선생님에게 무례한 일이 있다면 저 정말 가만있지 않겠어요. 교무부장이 시킨 *****일은 제가 알고 있으니까 그 일은 제가 다 해결해서 교무부장에게 넘길게요. 걱정말아요.


음.. 그리고 선생님은 소심한게 아니예요. 신중하고 사려 깊은 겁니다. 무례한 건 그 사람이고, 선생님 자신을 탓하지 말아요. 저도 30살에는 아무 목소리도 못냈어요. 그런데 나이가 점점 저에게 힘을 주더라고요. 선생님은 신중한데 똑똑하기까지 하니까 저와 비교도 안되게 멋진 목소리를 내실 거예요. 선생님, 제가 늘 응원합니다."

 

교무부장과 소리지르며 싸운 일은 준혁샘에게 너무 창피했지만, 준혁샘도 교무부장에게 많이 당해왔다는 것과 앞으로 내가 후배를 위해서 또 소리질러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이렇게라도 후배의 고충을 알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되었단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소리 지른 거 후회하지 않아요. 사과도 안할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저에게 무례하면 더 많은 사람 앞에서도 망신줄 수 있어요. 제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사람들 앞에서 망신 줄 때 그 사람이 도망가면 꼭 '어디 가세요, 제 말 안끝났거든요.' 해. 아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야."


예, 정말 할지도 몰라요. 어디 가세요, 제 말 안 끝났거든요?


저 차분하게 글썼지만, 사실 굉장히 격앙되고 떨리는 목소리로, 곧 울 거 같은 목소리로 소리 질렀어요. 왜냐하면 남에게 분노하며 소리 치는 것이 저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매우 아마추어거든요. 그리고 제 기억에 의존해서 썼지, 과장되게 글 쓰고 실제로는 타격력이 적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저는 제가 제 안의 목소리를 밖으로 냈다는 것, 더 이상 당하고만 살지 않는다는 것이 좋았어요.


남의 힘듦을 미루어 알아주는 거조차 안되는 공감 능력 제로인 인간들에게 저는 앞으로도 제 목소리를 분명하고 또렷하게 내기 위해서 제 성격을 바꿀 거예요. 친절하지만, 네가 무례하면 물어준다? 이런 성격으로. 떨리고 울 거 같은 목소리여도 계속 말할 거예요.


이 글을 왜 썼냐면요. 그냥.. 저처럼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시기 어려운 분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썼어요. 저도 잘 안되고, 이 모든 것이 참 낯설지만, 그래도 헤쳐나가보고 싶다고. 점점 선배로서의 무게가 커지는 나이로 돌입하는데, 당하고만 있는 선배, 후배가 당하는 꼴을 보고 외면하는 선배는 되고 싶지 않아요.


무엇보다 저는 너무나 오랜 세월 가장 소중한 제 자신을 가장 무시해온 것만 같아요. 제 목소리를 억압했잖아요. 저는 저에게 가장 나쁜 일을 해왔어요. 인생 후반전에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저도 엄연히 목소리가 있는 1인분의 사람인 걸요. 세상 모든 사람이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 맞는 거잖아요. 누가 목소리 크다고 그 사람 말이 옳은 것도 아니고요. 작더라도 제 목소리를 내고, 옆에서 더 작은 목소리를 가진, 혹은 아예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사람을 위해서 제가 힘을 내어 그 사람의 소리까지 내주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어요.


대화명 바꿀까봐요. 어디가세요, 제 말 안 끝났거든요?로..... ㅎㅎ

그래도 가끔씩 들리는 빗소리가 좋으니 참아봅니다.


행복한 밤 되세요. 저도 제 목소리를 내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며 더 행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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