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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Nov 04. 2024

아무도 모른다

저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입니다. 경계도 심한 편이라 친하지 않은 이에게는 절대 개인사 중 조금이라도 조심스러운 이야기들은 꺼내지 않아요. 누구와도 나눌 수 있는 소재의 이야기만 공개하는 편이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욕망은 늘 들끓는 희안한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 좋다는 표현은 참 주관적이죠. 제게 있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영혼이 순수하고, 자기의 색깔이 분명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겪고도 마치 조르바처럼 자기 색깔을 꼿꼿이 지키는 사람.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세상이란 다랑어와의 싸움에서 치열하게 싸워내도 자신을 마침내 잃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알아챌 수 있냐고요? 저는 그런 영혼의 내음을 맡는 데에 특화된 사람 같습니다.

 

초등학교 때 전학만 3번을 다녔어요. 4개의 학교를 다니며 가는 학교마다 왕따를 자주 당했습니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터라 이방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한 달 정도 왕따 숙련 기간(?)을 거쳐야지만, 그네들 사이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단기간의 왕따였어도 매번 겪어야 하는 왕따 숙련 기간은 제 어린 시절의 크나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사실 아이들이 일부러 시킨 왕따는 아니었던 거 같아요. 제가 아이들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머뭇거림이 더 큰 원인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사람 사귀는게 어렵고 부끄러운 아이가 매번 새 학교에서 새로운 울타리 안을 뚫고 가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직도 등하교길에 울면서 보았던 그 풍경들이 지금도 생생한 걸 보면 그때의 기억은 여전한 상처로 남아 있는 거 같습니다.

 

왕따 숙련 기간 동안 저는 사람 관찰, 사람 경계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느꼈던 좋은 사람은 영혼이 순수하고 맑은 사람이었던 거 같아요. 누군가를 도구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진정 좋아하는 마음으로 대했던 사람. 그런 사람들을 저는 좋아했고 따랐습니다. 반복적으로 그 사람들 속에서 지내면서 그 사람들의 영혼 냄새를 기억했어요. 어느 새로운 곳을 가도 저 사람들의 영혼만 찾으면 어쩌면 나는 숨구멍 트인 삶을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요.

 

어른이 되어서도, 직장을 가져서도 저는 계속 새로운 곳을 가야할 때면 어린 시절의 그 기억이 떠올라서 바짝 긴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끊임 없이 그 영혼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찾아 헤맵니다. 그 사람이 기간제 직원이어서 고작 몇 주를 일하고 가든, 당장 내년이면 다른 학교를 떠나야 하든 그런 건 전혀 상관 없었어요. 그 영혼의 냄새를 가진 사람이라면 고작 며칠 함께 지내는 것만 해도 행복하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었거든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두 달 동안 함께 일한 보건 선생님이 딱 그런 사람이었어요. 50대 초반의 언니여서 저랑 무려 10살 가까이 차이가 나네요. 수학 여행 즈음에 오셔서 저는 모르는 사람과 강제로 같은 방에서 2박 3일을 숙식해야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50대 후반 선생님과도 함께. 40대의 저와 50대의 선생님 두 분과 그렇게 셋이서 숙식을 시작했습니다.

 

생각만해도 어려운 상황이라 가기 전까지 걱정이 많이 되고 힘들었어요. 가뜩이나 집 밖에서 자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저보다 훨씬 언니인 분들과 지내야 하는 상황이라니요. 그러나 그 2박 3일은 저의 선입견을 아주 박살낸 시간들이었습니다. 언니들이 너무 선하고 훌륭한 사람들이었거든요. 특히나 보건선생님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수학여행 때 처음 뵈어야 하는 상황이라 더욱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 걱정은 말끔히 사라질만큼 따뜻하고 포근한 보건 선생님과 지내며 저는 마음 푹 놓고 언니들에게 마음과 몸을 기댈 수 있었습니다. 3일 째 되는 아침이 슬프게 느껴질 정도로 그 시간들을 진심으로 즐겼어요. 언니들도 잘 따르고 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막내를 귀여워하셨고요. 서로 합이 잘 맞고 가장 즐겁다 하는 시점에 헤어져야 해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별안간 찾아오는 슬픔(?)을 맞보기도 했습니다.

 

작은 시골 학교이고, 서로 업무가 겹치지 않아 보건선생님과는 그 이후로 따로 사적으로 만나 대화해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더군다나 10월의 학교는 무척 바쁜 시기이잖아요. 정신 없이 지내다가 보니 어느덧 보건선생님의 마지막 계약날이 다가와버렸어요.

 

제게 고마운 기억을 준 사람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보건 선생님을 찾아가 수학여행 세 자매의 조촐한 송별회를 갖고 싶다 제안했어요. 학교 차원의 송별회는 없었기에 저라도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거든요. 보건 선생님은 진심으로 고마워하셨어요. 보건 선생님은 다른 지역에 사셔서 1시간 30분 거리의 출퇴근 길을 오가고 계셨어요. 아예 다른 시도에 살고 계셨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을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게 해드릴 수 있을까 싶어서 세심하게 분위기 좋고 맛있는 인도 음식점과 아름다운 카페를 하나 하나 골랐습니다. 뭐 그리 힘들게 고르냐며 미안해하셨지만,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귀하게 대접하는게 진심으로 기쁜 사람이라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선생님 2분과 준비한 식당과 카페를 하나씩 도는데,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니 행복하더라고요. 이렇게만 끝나도 좋다하며 조용히 두 분의 이야기를 경청하는데, 이야기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지점까지 흘러갔습니다.

 

솔직히 보건 선생님에 대해 편견이 있었어요. 남편분께서 의사이신데다가 좋은 차를 끌고, 좋은 옷을 입으시길래 좋은 집안에서 풍족하게 살다가 비슷한 남편을 만나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오신 분인가 싶었어요. 나와는 다른 환경인 거 같아서 처음에는 편견을 가지다가 수학여행 때 순수한 마음에 끌려 친해진 거였거든요. 그런 보건 선생님께서 갑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꺼내시는데, 내가 얼마나 편견으로 똘똘뭉친 어리 석은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기가 찼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장애인이었어요.”

 

일단 그 한 문장에 저의 편견의 벽은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선생님의 엄마, 아빠의 장애는 생각보다 심했어요. 엄마는 어릴 적 사고로 팔 한쪽을 완전히 잃으셔서 의수를 하신 분이었고, 아버지 또한 어릴 적 사고로 허리가 완전히 꺾여 다리 아래쪽을 아예 쓰실 수 없는 장애를 가지셨다 해요. 산골 마을에서 지체 장애인 두 분께서 아이 다섯을 낳아 기르시는데, 얼마나 먹고 살기가 어려웠을까요. 어머니는 불편한 몸으로 푸성귀를 뜯으며 장에 내다 팔며 가난한 살림을 보태셨다 해요. 비록 장애로 몸이 불편했지만, 두 분 다 의지가 강한 분들이었기에 남에게 손 빌리지 않고 떳떳하게 자식을 키우기 위해서 남들보다 두 세배로 일하며 자식을 살뜰히 돌보셨지요. 마음대로 쉴 수도 없이 바쁘게 지내느라 어머니께서는 남은 다리 한쪽도 잘라내고 의족을 차야 할 정도로요. 성실과 사랑으로 키우신 덕분에 선생님은 제가 봐도 마음이 참 예쁜 사람으로 자라난 거 같아요. 언제나 아이들을 성실히, 따뜻하게 돌보시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요.

 

보건선생님은 산골에서 자라느라 아주 작은 학교를 다녔는데, 지금의 우리 학교가 꼭 그런 학교라 지난 두 달 동안 너무나 행복했다고,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릴 적 기억이 떠올라서 코끝이 찡해져 자주 울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선생님이 수학여행 때 아이들을 쳐다볼 때마다 가끔씩 울컥하시는 것이 궁금했는데, 그제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7년 전 교권 침해를 당해서(당시에는 지금처럼 교권보호위원회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터라) 다시금 교사로서 세상에 나오는 데에 7년이 걸렸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지만, 7년만에 다시 만난 학교가 이런 학교였고, 순수한 아이들과 만나서 이제 학교가 마냥 무섭지 않다고 웃으셨어요. 그 웃음이 너무 아파서 저는 한참을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고요. 학교가 정말 깡시골에 있어서 아이들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 대도시 기준으로는 거의 10년 전 아이들인 것 마냥 순수하거든요. 그런 아이들 곁에서 선생님께서 진심으로 행복한 두 달을 보내셔서 기뻤어요. 더 기쁜 소식은 이 마을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11~12월 계약도 일부러 이 마을의 다른 학교에서 찾아보고 계시다고, 세 시간 왕복 출퇴근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우리의 인연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희망에 얼마나 설레이던지.

 

아마도 보건 선생님의 송별회 전까지 저는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이리 듣게 될줄은, 그녀의 인생 이야기가 제 가슴에 좋은 영향을 퍼뜨리게 될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내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지,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정말 모르는 거 같아요. 그렇기에 모든 사람에게 정말 친절해야겠구나, 대가 없는 친절로 누군가의 창문이 열리기를 고대해야겠구나 생각해봐요.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새가 얼마나 아름다운 새일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보건 선생님이 해주신 인생 이야기가 더 많지만, 지금은 고인이 되셨던, 장애가 있어도 그 어떤 비장애인보다 빛나는 인성을 가졌던 그녀의 부모님 이야기는 꼭 글로 풀어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인성이 아픈 사람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두 분의 마음은 참 빛이 났거든요. 아픈 몸으로 다섯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두 배는 더 바쁘게 움직이셨을 두 분의 이야기가 게으른 저에게 죽비 소리가 되었어요. 중요한 건 결국 단단한 마음이라고. 어떤 순간에도 단단한 마음으로 내 자식을 인성이 따뜻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더 고민하고 노력해보자고.

 

끝은 새로운 시작이지요. 보건 선생님과 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겨울방학에 놀라오라고 여러 번 저에게 다짐을 받으신 보건 선생님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는 그녀의 마을로 겨울방학 때 놀러갈까 해요. 맛이 끝내준다는 콩나물 국밥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보건 선생님이 꺼내주는 보물 같은 이야기의 경청자로서 또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는 보물 같은 사람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저는 친절이라는 좋은 도구를 계속 손에 쥐고 있어야겠지요. 아주 순간적인 반짝임으로만 발견할 수 있는 그 보물들을 발견할 때마다 환호하면서요. 어제 내가 캔 보물이 진짜 반짝임을 가진 보물이었음을,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모두 얇은 막에 뒤덮여 있는데, 그 막을 까기 전까지는 정말 꿈에도 그 사람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아무도 모르죠. 그 사람의 진가를. 친절과 사랑으로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이 스르륵 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알 수 있어요. 그 사람의 진짜 모습, 그 반짝임을.

 

행복한 주말 되시길요. 당신의 삶에도 이런 저런 보물들이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길요. 자주 나타나지 않지만, 반드시 있는 그 보물을 꼭 캐내는 기쁨을 놓치지 않길 바라며.... 주말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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