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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Nov 16. 2024

정갈함을 사랑합니다

윈도우의 기본 메모장을 좋아합니다.

깨끗하고 정갈해서 참 좋아요.

메모장을 켜고 글자를 쓰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정갈함.

저는 정갈하게 사는 걸 좋아합니다.

정갈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정갈하게 외모를 다듬고.

그런 것을 지향하지만,

에너지가 없고, 손가락이 서툴러서

항상 그리 정갈하진 못합니다.

손끝이 야물고 부지런하여

정갈하게 자신과 주변을 꾸며가던 엄마에게

오래도록 열등감과 시기를 느꼈어요.

마음의 들끓음을 지나

지금은 타고난 에너지가 적은 게 저의 잘못이 아니며,

그런 상황에서도 애쓰며 살아가는 거 자체가

진짜 멋진 거라고 생각하며

엄마를 시기하지 않고,

나를 비난하지 않으며 삽니다.


언젠가 제가 저만의 공간을 가진다면,

아마도 예쁘고 아기자기한 공간이 되기보단

정갈하고 반듯한 공간을

더 만들고 싶어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제까지 저는 자취를 할 때조차도

온전히 혼자 살아본 적이 몇 년 없고,

(항상 룸메가 있었음)

몇 년 있을 때조차 직장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집을 무척 더럽게 썼던 기억이 있어요.

그 생각을 하면 집에게, 견뎌온 나에게 미안하네요.

그래서 언젠가

좀 더 에너지가 생기고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다면

(저는 글 작업실이 되지 않을까 예상하지만)

그때는 제 마음의 취향을

온전히 쏟아 정갈하게 꾸며보고 싶다 생각해요.


어제는 금요일이기에 너무나 들떠

오래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좋아하는 삼시세끼 프로그램을 보며 잔잔하게 웃었어요.

책 몇 장이라도 읽으며 좋아하는 문장을 찾아 헤맸고요.

오늘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에

놀라고 통탄하며 일어났어요.

어제 사정이 있어 아파트 바깥에 차를 세워두어서

멀리까지 걸어가는 길이었는데,

그 아침길이 단풍나무들로 무척 예쁜 거예요.

아침 산책을 오래전 부터 좋아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아침 잠이 많아서 아침 산책이 쉽지 않지만,

어쩌다 경험하는 아침 산책은 황홀하네요.


학교에 와서

아무도 없는 학교를 혼자 차지하며

이곳 저곳을 산책하고 은행 나무를 찍어 보았어요.

올해는 빨강이, 노랑이 이리 예쁠 수가 없는 거 같아요.

아침 산책 후 교실로 돌아와서 바닥을 한 번 쓸다가

커피를 내리고 사온 빵을 먹었어요.

한참 라디오를 들으며 멍을 때리다가 아침 산책을 하며 들었던 생각들을 써보자하며 컴퓨터를 켰지요.


저는 CBS 레인보우 앱을 깔고 라디오를 듣는 걸 좋아하는데, 찬양 채널도 있고, 클래식이나 가요를 들려주는 채널도 있어서 좋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김정원의 아름다운 당신에게(클래식), 최강희의 영화 음악, 배미향의 저녁 스케치(올드팝)입니다. 그 중 가장 좋아하는 건 18시부터 하는 배미향의 저녁 스케치인데, 저에게 올드팝은 곧 아빠의 존재여서 들을 때마다 아련해집니다. 자주  듣다가 울기도 합니다. 배미향씨는 50대 여성으로 추정되는데, 목소리가 중후하고 깊어서 멋져요.


이제 올라가서

아이들 돌봄 간식 챙겨주어야 할 시간이네요.

토요돌봄은 진절머리 나도 저는 아이들을 보는게 좋아요.

아직 무엇이 정해지지 않은, 속절 없이 해맑은,

지금의 나는 잃어버린, 그 세계의 인류들을 좋아해요.

그들과의 대화는 제 오랜 창작의 원천이죠.


험한 세월을 많이 겪어

제 안의 순수함을 지켜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저는 아직도 제 마음의 일부분을

원시림 그대로 지켜주려 애써요.

부단히, 부단히 애써요.

그 원시림의 소중함을 알기에

순수함이 숨쉬듯 당연한 어린이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투명한 피부를 가진 그들의 특권만큼이나

그들이 가진 순수함은

아무리 덮어도 뚫고 나오는 대단한 것들이에요.


오전 시간이 다 지나가요.

예전에는 부지런하게 살지 않으면 아쉽고 애가 탔는데,

이제는 어영부영 흘려버리는 이 시간에

전혀 애가 타지 않아요.

팽팽했던 평일을 버텨주는 것이

이 헐거운 시간 같아서요.


나의 평일을 버텨주는 이 헐거운 시간들을

온전히 즐기는 당신 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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