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가.
처음 글을 썼던 날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 마음 속에 계속 간직하고 있는 화두입니다. 저는 왜 글을 쓸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이가 태어나고 100일쯤 지난 뒤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글을 쓸 수 없을 만한 때, 글쓰기를 시작한 거죠. 아이러니합니다. 그때의 제 글쓰기는 미칠 것 같은 답답함으로 분출을 하듯 써내는 것들이었어요. 더 이상 제 몸 안에 있다가는 제가 큰일이 날 거 같아서 빈 화면에 대고 솟구쳐 오르는 글자를 토해내곤 했어요.
친구들에게 저는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를 낳은 뒤로는 마치 휴대전화 절전모드처럼 뇌의 절반만 쓰고 사는 기분이라고. 나머지 절반은 오로지 아이에게 몰입 되어 있는 것만 같아서 그것은 나의 뇌가 아니라고. 한 번도 전적으로 내가 무언가에 정신을 모으고 있다 생각된 적이 없습니다. 늘 산란한 정신을 겨우겨우 그러모아 해내는 아슬아슬한 일들이었죠.
글쓰기가 그랬습니다. 슬펐어요. 제가 이제 뇌의 절반만 쓸 수밖에 없을 때 글을 시작했다는 것이. 그런 저를 버지니아 울프가 위로하였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길 옛 시대의 여성들은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없었다 해요. 브론테 자매 같은 경우도 아이들이 뛰어놀고, 손님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거실 한가운데 앉아 30분도 채 집중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글을 조금씩 쓰며 책을 완성했다 합니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태어난 책이 바로 폭풍의 언덕, 제인에어 등이죠. 이 문장들을 읽을 때 자꾸 눈물이 차오르더군요. 그렇게 아주 조금씩 그러모은 문장들이 결국에는 책이 되고, 많은 이에게 사랑받았다는 부분이 위로가 되었어요.
아이에게, 일에, 글에...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매일매일을 정신 산란한 상태로 살아가는 나. 이런 산란한 상태에서 완성도가 현저히 낮은 글만 쓸 수 있으면서도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아마도 저는 연결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많이 힘드시죠, 저도 그래요.’, ‘삶이 참 암울하네요. 그래도 좋은 생각하며 내일을 다시 잘 살아내고 싶어요.’, ’친절함이 점점 희귀해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어쩌다 만나는 친절함은 동앗줄 같이 저를 살게 해요. 저도 누군가에게 동앗줄이 되면 참 좋겠어요.’, ‘정직한 노동, 성실한 태도가 폄하되는 시대예요. 하지만 결국 본질은 강합니다.’ 이런 말들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나이 들수록 사는 것이 훨씬 더 쉬워질 거라 믿었는데, 삶은 꼭 점점 끝판왕을 향해 가는 게임처럼 어려워지는 거 같아요. 어릴 때는 몰랐던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알게 되고, 생각지도 못한 슬픈 일들이 자꾸만 닥쳐오면 어디론가 숨고 싶어져요.
끝나지 않은 것 같던 어둠이 물러가고,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이 시작되는 게 저는 그렇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작고 소소한 기쁨을 느낄 때면 마른 목에 물을 붓듯 마음이 차오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저에게 있는 그런 기쁨의 순간들로 글을 만들고 싶었어요. 힘들어도 살만한 세상. 분명한 가치가 있는 삶. 그걸 믿는다고 열 번, 백 번 말하고 싶었어요.
울프처럼, 브론테 자매처럼 저는 씁니다. 아이가 뛰어다녀도, 문이 열렸다 닫혀도 계속 씁니다. 결국 그 멈추지 않는 쓰기가 나를, 나의 글을 읽는 누군가를 향한 동앗줄이 될 거라 믿으며. 이 멈추지 않는 열정이 나에게는 글로, 누군가에는 또 다른 어떤 것으로 세상의 한 모퉁이에 선한 변화를 일으키는 무언가로 전환될 것임을 믿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