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NPC니까
과장 시절 이야기다.
그때는 의욕이 넘쳤다. 진짜로. 회의 때마다 아이디어 냈고, 보고서는 밤새워서라도 완벽하게 만들었다. "이번 건은 내가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이런 말도 스스럼없이 했었다.
그 시절에 회의와 보고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첫 번째는 회의 때였다.
임원회의 전에 부장님 주관으로 사전 리뷰 회의를 했다. 프로젝트 방향에 대해 의견을 물어봐서 내가 제안했다. 나름 고민 많이 한 아이디어였다. 근데 부장이 "야 그게 되겠냐?" 하면서 넘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임원회의 때
프로젝트 방향에 대해 임원이 내가 말한 거랑 거의 똑같은 내용을 말했다.
"이런 방향은 어떨까요?"
그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아, 역시 좋은 아이디어네요!"
"그 방향으로 가는 게 맞겠습니다."
어?
내가 했던 말 아닌가?
무시당한 기분이라 정말 억울했다. 진짜로. 근데 아무도 내가 먼저 말했다는 걸 기억 못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가.
두 번째는 보고서 작성할 때였다.
중요한 프로젝트라 일주일 밤샘하면서 초안 작성했다. 데이터 분석하고, 시장 조사하고, 방향성까지 다 정리했다.
부장한테 검토 맡겼더니.
"이게 뭐야.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내가 안 보면 일이 제대로 진행이 안된다니까 정말. 이거 다시 하고. 이건 확인해 봤어? 지점에 물어봤어? 다 고쳐! "
하면서 빨간 펜으로 전부 다 고쳤다. 내 초안은 거의 형체가 안 남을 정도로.
"다시 해. 이렇게 하면 팀장님이 뭐라고 하시겠어!!."
나는 속으로 욕하면서 부장 스타일대로 다 뜯어고쳤다.
그리고 일주일 뒤 팀장 보고.
팀장이 보고서 보더니 말했다.
"음... 이건 아닌 것 같아. 김 부장 이거 자료 봤어요? 이렇게 하면 어떡하나. 로직을 이렇게 해서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나요?"
그게... 내 초안이었다.
정확히 내가 일주일 전에 썼던 바로 그 내용.
부장이 당황하면서 "아, 네... 그렇게 수정하겠습니다" 했다.
결국 내 초안으로 돌아왔다. 젠장 일주일 밤샘은 뭐가 됐나.
근데 아무도 몰라. 그게 내가 처음에 쓴 거였다는 걸. 부장도 기억 못 하는 것 같고, 임원은 애초에 내 초안을 본 적도 없으니까.
그런 부정적인 피드백이 몇 년에 걸쳐 쌓이고 쌓였다.
나는 점점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의견을 내도 어차피 씹힌다. 아이디어를 내도 누군가가 가져간다. 보고서를 열심히 써도 엉터리라고 뜯어고쳐진다.
내가 능력이 부족하기도 하겠지만,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게 점점 쌓이니 무기력해진다.
그럼 뭐 하러 애쓰나.
그래서 어느새부터인가 이렇게 산다.
회의 때 물어보면 "검토해 보겠습니다."
보고서는 바로 윗 상사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처음부터 쓴다.
의견? 거의 안 낸다. 시키는 것만 한다.
이게 미션 수행이다.
과장 때는 몰랐다. 의욕이 넘치면 알아주겠지 생각했다. 열심히 하면 인정받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니더라.
회사는 의욕을 가지고 적극적인 직원을 원하는 게 아니라, 미션 수행을 잘하는 사람을 원한다.
하찮은 내 생각이 아니라, 대단하신 윗사람 생각을 원한다.
그걸 깨닫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제는 안다.
나는 NPC라는 걸.
게임 속 NPC가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면 이상하잖아. 그냥 "마을 동쪽에 던전이 있습니다" 하면 된다. 정해진 대사만 하면 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부장은 "네, 진행하겠습니다" 하면 된다. 누가 무시해도, 누가 내 아이디어를 가로채도, 그냥 "알겠습니다" 하면 끝이다.
억울한가?
응, 억울하다.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미안하기도 하다.
근데 어쩌겠어. 이게 생존이다.
과장 때 그렇게 열심히 했던 나는 지금 없다. 대신 미션만 수행하는 부장이 있다.
이게 NPC의 진화다.
의욕 → 좌절 → 체념 → 생존.
오늘도 누군가는 회의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낼 것이다. 그리고 무시당할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보고서를 밤새워 쓸 것이다. 그리고 엉터리라는 소리를 듣고 다시 쓸 것이다.
그게 나였다. 과장 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냥 NPC다.
누가 나를 무시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왜냐고?
나는 NPC니까.
이게 편하다.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