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국범근 Sep 14. 2022

바르셀로나 쉐어하우스에서는
매일이 비정상회담 실사판!

덴마크, 멕시코, 헝가리에서 온 친구들과 세상에 대해 수다를 떨다.

2022년 2월 4일에 쓴 글


오늘로써 이곳에 온 지 딱 한 달이 되었다. 원래 일정보다 두 달 정도 더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을 정도로 나는 이곳에서의 삶에 슬슬 정을 붙여가고 있다. 이곳의 많은 것이 좋지만 그 중 가장 각별한 것은 룸메이트들과 한가로이 보내는 시간이다. 


내가 지내는 곳은 스페인어로 'Piso compartido'라고 불리는 쉐어하우스 형태의 집이다. 방만 개인 공간이고 거실, 주방, 화장실, 세탁실 등 핵심 시설은 모든 구성원이 함께 공유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집 전체를 임대하는 것보다 월등히 저렴하기 때문에 'Piso compartido'는 스페인의 젊은 세대가 가장 선호하는 주거 양식이라고 한다. (내 piso의 월세는 395유로. 한화로는 55만원 정도였다. 바르셀로나에서 이 정도면 매우 저렴한 편.)


https://youtu.be/ROyvOrg1rAk

내 piso의 모습이 담겨있는 동영상! 내 생일 때 직접 만들었다. 
내가 지내던 방. 이런 방을 개인 공간으로 쓰고... 


거실, 부엌, 화장실 등의 공간을 함께 쓰는 구조다.




우리 집에는 나를 포함해서 총 5명이 살고 있다.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약대 석사 과정을 하고 있는 95년생 멕시코 출신 '루이스',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세르비아 출신 '밀로', 호텔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는 덴마크 출신 97년생 '미셸라', 한 학기 교환학생을 하기 위해 온 헝가리 출신 01년생 '실비아'. 다들 국적은 다르지만 비슷한 또래라서 하고 있는 일이나 가지고 있는 고민들이 비슷비슷하다. 


왼쪽부터 나, 루이스, 실비아, 밀로, 미셸라. 실비아의 21살 생일에 찍은 사진!


낮에는 저마다의 할 일을 하느라 집을 비우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다같이 식탁에 둘러 앉아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곤 한다. 대화의 내용이 재미있기에 각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얘기하다보면 어떤 때는 앉은 자리에서 3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기도 한다. 어제 저녁이 그랬다. 안타깝게도 세르비아 출신 밀로는 바쁜 나머지 그 날 자리에 없었다. 


대화의 주제는 다양했다. 각자의 삶의 고민부터 시작해서 역사, 문화, 국제 정치, 경제, 환경 문제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오갔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정리를 좀 하고 싶어서 기록을 남겨둔다. 


기후변화 문제는 역시 모두가 느끼고 있는 큰 걱정거리였다. 벌써 여러 해안도시들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토론을 나누었는데, 에너지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신기술이 나오지 않는 한 상황이 계속 나빠지기만 할 것이라는 점에 모두가 동의했다. 또한 인류가 과연 산적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할 만큼의 지성을 갖추었는지에 대해서는 다들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영화 '돈 룩업' 속의 사회가 결코 과장된 묘사가 아니기에, 앞으로 빈번할 전염병, 식량위기, 기후난민, 전쟁 등 국제적인 재앙이 걱정된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특히 실비아는 자기가 살아서 80살을 넘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서도 모두가 큰 걱정을 했는데, 만일 최악의 시나리오로 간다면 세계 3차 대전도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의 국제 전문가들은 실제 전쟁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전망하긴 하지만, 역사 속의 많은 전쟁이 그렇듯이 우발적인 사건에 대한 어리석은 대처가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오는 경우가 잦으므로... 미셸라는 3차대전이 일어나게 된다면 며칠 내에 인류가 공멸하며 끝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렇기에 만약 TV에서 3차대전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본다면 보드카나 한 병 원샷하고 잠에 들 거라고 했다. 왠지 세계의 전망에 대해서 얘기하다보면 분위기가 어두침침해졌다. 


(이후 한 달 즈음 뒤, 모두가 알다시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집에서 그 뉴스를 들으며 다들 충격에 빠진 일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덴마크는 역시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있기로 유명한 나라여서 유학생들에게 장학금도 많이 주는 모양이다. 루이스가 미셸라에게 남자친구랑 헤어질 때도 정부에서 지원금을 주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을 정도. 미셸라는 정부로부터 학비를 전액 지원 받아서 유학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보통은 자랑 같아서 말을 아낀다고는 하는데, 이미 우리끼리 덴마크인을 부러워하는 것은 일종의 밈이 되었기 때문에 다같이 웃고 넘기는 분위기. 나는 한국에서 북유럽 사회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한국이 'Exciting hell'이라면 덴마크를 포함한 북유럽 사회는 'Boring heaven'이 야니냐고. 


미셸라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헝가리 출신 실비아는 자국 사회에 대한 애정이 그닥 없는 듯 했다. 현직 총리가 20년째 장기 집권 중일 정도로 민주주의 수준이 낙후되어 있고, 사회 풍토도 아직 권위주의적이며 차별이 만연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실비아 피셜) 자신이 만일 아이를 낳게 된다면 반드시 다른 나라에서 키울 것이라고도 말했다. 실비아는 총리가 강한 친러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매우 탐탁치 않게 여겼다. 헝가리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실비아는 우리 중에서 러시아 - 우크라이나 사태를 가장 심각하게 보았다. 결코 남의 일일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아무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규가 깊어질 수록 실비아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친러 성향의 헝가리 총리 '오르반 빅토르'. 실비아는 이 사람을 두고 '푸틴의 애교 많은 강아지'라고 표현했다. 


멕시코 사회의 모습은 여러모로 한국과 비슷해보였다. 일 많이 하고, 적게 쉬고... 덴마크와 헝가리가 성인이 되면 독립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부모와 함께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또한, 디즈니 픽사 영화 '코코'에서 엿볼 수 있듯이, 성인이 되든 말든 가족 간의 유대가 이어지는 것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긴다고도 했다. 루이스가 매일 부모님에게 연락한다고 말하자 실비아와 미셸라는 다소 뜨악하는 반응을 보임. 


나는 루이스의 이야기를 받아 내가 한국 사회에 대해 내가 아쉽게 여기는 점들을 이야기했다. 남을 의식하는 정서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삶을 꾸리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점. 나이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면서 온갖 창의적인 위계질서를 만들어내는 점. 여담으로, 얘네가 제일 이해 못하는 게 윗사람과 건배할 때 잔을 옆으로 돌려 마시는 행위.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묻는 말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즈음 실비아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내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한국인들은 주로 자기들끼리 다니면서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Too Shy'한 경향을 보이던데 이유가 있는 거야? 


한참을 생각하며 대답을 고르던 내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눈치" 


남의 시선 너무 많이 신경쓰는, 한국의 '눈치' 문화가 주요한 원인일 거라고 나는 말했다. 언제나 틀리면 안되고, 쪽팔리면 안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있어 외국어를 하는 것은 항상 일종의 시험이고, 그 자체가 피곤한 일이라 그들만의 'Safe zone'에 머무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라고.  


또한 모두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삶의 기준이 거의 정해져 있다시피 해서 그 밖으로 벗어나는 건 큰 불안을 감내해야한다는 점. (20대 중반에는 대학교를 졸업해야하고 서른 즈음에는 결혼을 해야하고, 집을 마련해야하고 등등...)  한국인의 이상적인 생애주기로 따지면 나는 하나도 부합하는 게 없으니 요즈음 부쩍 불안함을 느낄 때가 많다고도 이야기했다. 그러다보니 각자가 가진 삶의 불안들을 하나 둘 씩 꺼내놓게 되었다. 


루이스는 돈이 잘 되는 전공을 포기하고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찾아 여기에 왔다고 했고, 미셸라도 친구들 중에 자기가 가장 괴짜라고 했다. 결혼 생각 안하고, 여기저기 해외에 나다니며 유학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자기 밖에 없기 때문에. 실비아도 막연히 외국에서 살고 싶기는 하지만 아직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마음이 확 풀어지고 눈과 귀가 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세상은 넓고 삶의 모습은 다양하다. 나는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나의 길을 가고 있는 것 뿐이다. 


아, 다들 한글을 아주 신기해했다. 자+모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표음문자가 매우 편리해 보인다며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한글을 배우고 싶다고도 했다. 그래서 나는 과거 류소기 시기 중국 공산당에서 한자보다 더욱 효율적인 한글을 공용어로 채택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말해주었다. 또한 이 문자 체계가 순전히 어느 한 지도자의 의지와 능력만으로 발명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자 모두 아주 놀랐다. 국뽕 정말 싫어하는데, 이 정도 자부심은 느낄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다, 자부심이라기보다는... 한글과 세종대왕에 대한 한 인간으로서의 경외심이라고 하자.


어느 나라에나 고부갈등은 있는 모양이었다. 멕시코나 헝가리는 물론이고 가장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덴마크 사회도 상황은 비슷한 듯 했다. 실비아도, 미셸라도 아들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어머니 (그들의 표현으로)와의 갈등이 그들 관계의 가장 큰 위기였다고. 더 깊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민감할 수도 있는 얘기라 이만 줄여야겠다. 


이런 자리가 으레 그렇듯 'Bad word'를 가르치는 시간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는데, 나는 각자의 삶의 고민을 털어버리자는 의미에서 '조까'를 가르쳐주었다. 누군가가, 혹은 어떤 상황이 나를 괴롭게 만든다면 그때마다 속으로 '조까' 라고 되뇌이라고. 다들 발음이 귀엽다고 좋아했음.  


아무튼 좋은 룸메이트들을 만나서 참 다행이다. 뜻 맞는, 착한 친구들 사이에서 견문도 넓히고, 한 차례 크게 성숙해질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남은 시간 동안 이들과 더 재미있게 지내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