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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범근 Sep 13. 2022

열쇠는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르셀로나 밤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깨달은 것들. 

"Tranquilo. hijo. Tranquilo."
(여유를 가져. 꼬맹아. 여유를.)


돋보기 안경을 낀 중년의 택시기사가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띈 채로 내게 말했다. 나도 밝은 웃음을 보이며 그의 친절에 화답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니, 들 수가 없었다. 나는 꾸벅 목례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새벽 공기에 차갑게 식은 내 손목시계는 지금이 오전 3시 10분 즈음임을 알리고 있었다. 주황빛 가로등에 물든 도시는 인적이 없이 조용했다.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자동차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았다. 이 곳, 바르셀로나가 속한 스페인 카탈루냐 주에서는 오전 1시부터 통행금지령을 뜻하는 'Toque de queda' 정책이 시행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나 혼자만이, 버려진 드라마 세트장 같은 텅 빈 거리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취기와 졸음이 섞인 피로함이 떡진 머리에, 습기 찬 신발 속에, 담배 냄새 가득 밴 외투에, 무겁게 어깨를 누르는 가방 곳곳에 스며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빨리 숙소로 돌아가 침대에 내 몸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핸드폰은 이미 죽어버린지 오래라 달밤의 정처없는 여정을 끝내는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더욱 절망스러운 사실은, 내 주머니 속 어디에서도 숙소의 열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갈 곳은 있는데 갈 방법이 없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일단 어떻게든 숙소로 가까워지고 보자는 마음에 나는 물어물어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먼 하늘에서 은빛 보름달이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미뤄왔던 외로움이 훅 - 바람처럼 불어왔다.


난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요즈음 부쩍 속으로 많이 되뇌이던 말들을 아예 입 밖으로 꺼내어보기로 했다. 


"씨발, 끝장토론 한 번 해보자, 끝장토론." 나는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면서 공원에 놓인 어느 벤치에 눕다시피 앉아버렸다. 어차피 갈 곳도 없는 처지에, 어디서 뭘 하든 무슨 상관이랴. 낯선 나라에서 완벽하게 길을 잃어버린 지금 이 순간이 요즈음의 내 삶을 풍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실실 웃다보니 눈물도 나왔다. 참으로 옘병을 하고 있었다.



 또래보다 모든 면에서 앞서가던 시절이 있었다. 하고 싶은 일도 빨리 찾았고, 남들보다 성과도 빨리 냈으며, 덕분에 돈도 꽤 벌었다. 


그 시절의 나. (2018년 SBS SDF 포럼 강연 당시)


하지만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나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지금은 모든 것이 반대로 변해버렸다. 현재, 나는 모든 면에서 또래들보다 몇 년 뒤쳐져 있다. 친구들은 한국 나이로 27살인데 나는 아직도 대학교 2학년이고, 군대도 안갔다왔다. 모아뒀던 돈은 거의 다 써버렸고, 번번이 차이던 중고딩 시절과 판박이로 사랑에는 미숙하기만 하다. 내가 믿는 바를 쫓아 여기저기 좌충우돌 부딪히고는 있지만 내 뜻대로 풀리는 일은 하나 없고 앞날은 까마득한 동굴이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군대 갔다오면 곧 서른인데. 이 담에 커서 뭐가 될 건가를 생각하면 이젠 설렘 보다는 쓸쓸한 마음이 먼저 든다. 


한 마디로, 좆된 것 같다.


아이유는 25살에 '이젠 나를 좀 알 것 같다’고 했고, 제갈량은 27살에 중원을 평정하러 초야를 떠났는데, 지금의 나는 길도 잃고 열쇠도 잃은 채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다니. 부디 내가 꾸는 꿈만은 헛꿈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지만 글쎄. 이곳에 처음 온 4년 전과 지금의 고민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생각하니 더욱 막막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어쩌면 4년 뒤에도, 그 4년 뒤에도 비슷한 푸념을 하게 된다면? 


아직도 내게는 꿈이 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내 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넓은 세상에서 창조적인 일을 하며 사는 것이고, 둘째는 좋은 짝을 만나서 마음 편히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다. 영화를 만들고, 소설을 쓰고, 연기를 하고, 언어를 배우는 등의 활동들은 모두 첫째의 꿈을 실행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하고 싶은 것 여러가지를 그럭저럭 깔작거리고는 있지만 그중에서 내가 밥벌이를 할 수준의 경지에 오른 재주가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모두 막연한 자신은 있는데 확신할 근거가 없다. 학생 신분이라는 바람막이는 언제나 참 따뜻하지만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갈 수록 꽉 끼는 교복을 입은 듯 점점 불편하게 느껴진다. 내가 이러는 동안 친구나 동생들은 어느 한 분야의 프로가 되어가고 있고, 개중에는 이미 빛나는 스타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 남과 나의 인생을 비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우리가 살면서 하는 일 중에 스스로에게 해롭지 않은 것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그런 일들은 으레 하게 되니까 하는 거지,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이렇듯 약하고 쉽게 흔들리는 인간이다. 


두번째 꿈이야말로 더욱 아리송한 것인데, 내게는 정말이지,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어느 시점부터는 이에 대해서 아예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지만 종종, 아니, 자주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사람들은 내 곁을 스르륵, 스쳐 지나갈 뿐이었고, 그로부터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새로운 다짐을 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제는 조금, 조금 뭔가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입대를 몇 달 앞두고 있는 이 시점이 누구를 좋아하는 것도 송구하도록 만들어버렸다. 


내게도 인연이라는 게 있기는 있을까? 누군가는 여기서는 그딴 달달한 환상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앞뒤 재지 않는 망나니가 되어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려한 유혹으로 가득 찬 이 도시의 밤 거리가 마침내 텅 비어버릴 때까지 결국에 나는 홀로 걷고 있지 않았는가. 


언제나 다시 오기를 바라 마지않던 바르셀로나의 어느 변두리에서 이런 궁상을 떨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엄밀히 따져보면, 나는 지금도 내 꿈 속에 있었다. 


그래. 꿈이란 건 원래 이렇게 두루뭉술하고 몽롱한 법이지. 서러운 하품이 났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이 저 멀리 보였다. 적어도 생판 모르는 어딘가를 헤매는 건 끝난 셈이었다. 


다시 걸으며 생각했다. 이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을 줏어먹자고 나는 여기에 왔는가? 입대를 몇 달 앞둔 시점에서 가장 가치있고 재미있는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건만. 나의 이런 선택을 누군가는 철딱서니 없는 짓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부러워 마지않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문제는, 나름의 큰 결단으로 이루어낸 잠깐의 꿈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어학원에서 초급 수준의 스페인어와 낑낑대고 있노라면 더욱이 그런 마음이 커진다. 아니, 도대체 내가 스페인어를 배워서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학우들에게 왜 스페인어를 배우냐고 물어보면 다들 나름의 이유를 댄다. 석사 과정을 준비하느라,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싶어서, 이민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 스페인어가 좋아서 배운다는 대답을 하는 종자는 오로지 나 밖에 없다. 곽철용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듯 하다. 아니, 취미에 전 재산을 태워? 여기에 오기를 정녕 잘한 게 맞나? 


지하철 역을 지나 숙소의 문 앞에 도착했다. 시간은 새벽 4시에 가까워 있었고, 실내임에도 문 앞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쌀쌀했다. 소심하게 문을 몇 번 두드려 보았지만 초인종을 누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문득 피로가 쏟아지는 탓에 계단에 가방을 내던지고 털썩 앉아버렸다. 출근 시간때까지 기다려 볼 참이었다. 


3년 전, 나는 LA 할리우드에서 영어와 영화를 함께 배우는 어학연수를 했다. 그때도 앞날이 캄캄하고 불안하다는 생각은 지금이랑 똑같이 했지만... 초심자의 용기 덕분인지, 적어도 내가 꿈꾸는 세계는 훨씬 크고 아름다워 보였다. LA에 온지 3주 정도 지난 시점에서 나는 영화를 가르치는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교환학생으로 다시 LA에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 그래서 입시를 준비했고, 한예종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얻은 생동감의 불씨를 어찌저찌 이어붙이는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곳에서도 비슷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까. 찌릿- 감동처럼 찾아오는 삶의 계시랄지, 희망의 조짐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아직은 어두컴컴한 새벽 하늘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지만. 에라, 모르겠다. 몇 년 동안 유일하게 배운 게 있다면, 나는 생각을 버릴 수록 지혜로워진다는 점이다. 


https://youtu.be/BpKeAij0Ye8

2년 전에 만든 자기소개 영상. 이상의 이야기들이 더욱 잘 담겨있다. 


 나의 꿈과 관련된 노래 두 곡이 떠올랐다. 하나는 일본어로 된 노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페인어로 된 노래였다.  얕은 잠에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하면서 노래들을 흥얼거리고 있노라니 과거, 현재, 미래가 뒤죽박죽 섞여버린 시간의 틈바구니에서 잠시 쉬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探しものはなんですか?

찾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見つけにくいものですか?

찾기 어려운 것인가요?


かばんの中も机の中も

가방 속에서도 책상 위에서도


探したけれど見つからないのに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던걸요.


まだまだ探す気ですか?

아직도 찾아볼 생각입니까?


それより僕と踊りませんか?

그보다는 저랑 춤추지 않을래요?


夢の中へ 夢の中へ

꿈 속으로, 꿈 속으로


行ってみたいと思いませんか?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探すことやめた時

찾는 것을 그만두었을 때


見つかる事もよくある話で

발견되는 일도 종종 일어나니까


踊りましょう 夢の中へ

같이 춤을 춰요, 꿈 속으로


行ってみたいと思いませんか?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사이토 유키(斉藤由貴) - 夢の中へ (유메노 나카에) 1989


No pretendo ser tu dueño

난 당신 위에 군림하려는 게 아니예요.


No soy nada, yo no tengo vanidad.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걸요. 교만함은 진작에 버렸죠.


De mi vida doy lo bueno

내 인생의 가장 좋은 것만을 당신께 드릴게요.


Soy tan pobre, ¿qué otra cosa puedo dar?

내겐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을 더 드릴 수 있겠어요?


- Luis Miguel - Sabor A Mi 


30분 정도가 더 지났을까. 나는 마침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짧은 한숨을 쉬고... 초인종을 눌렀다. 룸메이트의 잠을 깨우는 것은 무척이나 미안한 일이었지만... 뭐, 나중에 술이나 한 잔 사주면 그만이지. 이윽고 러닝셔츠 차림의 룸메이트가 비몽사몽한 얼굴을 지으며 현관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기절하다시피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아무런 꿈을 꾸지 않았다. 


다음날, 세수를 하려고 화장실에 가보니 세면대 위에 열쇠가 놓여 있었다. 


열쇠는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2022년 1월 20일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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