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5개 구 길 위의 역사-구경(9경) 시리즈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독교인들에게 버킷리스트에 있는 것 중 하나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이 길은 이슬람군대로부터 이베리아반도를 지키고자 했던 기독교인들의 마지막 보루였다고 한다. 꼭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삶이 힘들거나 지금껏 왔던 삶을 정리해 보거나 새 힘과 방향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순례길을 가는 것 같다.
나도 꼭 가보고 싶은 길 중 하나이다.
'순례길'
서울에도 순례길이 있다. 북한산 둘레길 제2구간 일부이다. 이 길은 어떤 사연을 담고 순례길이란 이름을 갖게 됐을까? 순례길을 있게 한 인물 세 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인물은 심산 김창숙선생이다.
김창숙은 경상북도 성주에서 벌떡 일어나 짐을 꾸렸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1919년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은 기독계 16인, 천도교계 15인, 불교계 2인이었다. 여기에 유교계는 없었다. 조선 500년, 세상을 이끄는 사상이랍시고, 이 땅의 모든 기득권을 누렸던 유교계가 3.1 운동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치욕이었다.
김창숙은 늦게나마 독립의 염원을 담은 글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영남 유림의 어른이자, 김창숙의 스승 곽종석이 적극 나서서 도왔다. 김창숙은 120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들고 서울로 가서 다른 지역 유림들의 서명과 합쳐 '파리장서'를 완성한다. 이것을 전달하기 위해 상해로 잠입해 파리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해에 도착해 신한청년단에서 대표로 김규식을 이미 파리로 보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직접 가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김규식에게 '파리장서'를 전달하기로 한다. '파리장서'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파리에 전달됐고 국내에도 유포되었다.
이 일은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 국내에 관련 인물들이 줄줄이 잡혀 가 고문을 받았고 옥에 갇혔다. 김창숙의 스승 '곽종석'도 옥에 갇히고 만다. 70대 노구로 고문과 옥살이에 몸이 성할 수 없었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바로 세상을 뜨고 만다. 향년 74세였다.
이후 김창숙은 상해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한다.
1926년, 서울 한복판 명동에서 폭탄이 터졌다.
"2천만 동포여, 분투하라. 쉬지 말고 분투하라!"
향년 34세 나석주열사는 마지막 이 말을 남기고 자결한다.
폭탄이 터진 곳은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두 번째 폭탄을 투척한다. 그리고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펼치며 을지로 쪽으로 도주하던 중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 말을 외치고 자결했다.
나석주열사는 조선총독부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의열단'원이었다.
나석주의 의거에는 김창숙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아픔이 함께 한다. 사연은 이러했다.
김창숙은 독립군기지를 세우겠다는 결심을 하고 20만 원을 모금할 계획으로 국내에 잠입한다. 그러나 모금은 순조롭지 못했다. 모금액은 고작 3천 원가량. 실망스러운 결과를 안고 상해로 돌아간다. 독립군 기지를 세우기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지만 소중한 모금액을 의미 있게 쓰고자 한다. 그때 의열단원 나석주를 만났고, 그 자금으로 마련한 폭탄과 총으로 거사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김창숙이 가고 난 다음 영남지역에서는 무자비한 검거열풍이 분다. 모금활동이 들통나면서 관련된 인물들이 잡혀 들어갔다. 이 사건을 '제2차 유림단사건'이라고 한다. 체포되어 고통을 겪은 사람이 무려 600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 김창숙의 아들 환기도 있었다. 김환기는 끌려가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문을 받았다. 얼마나 가혹했는지 풀려나 치료를 받다가 얼마 안 되어서 죽고 만다.
김창숙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차마 남길 수 없었던 것이리라.
김창숙의 호는 '벽옹'이다. '앉은뱅이 벽'자를 쓴다. 앉은뱅이 노인이란 뜻이다.
1927년 상해에서 김창숙은 끝내 체포, 대구로 압송되어 온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변호사를 거부했다. 이유는 단호하고 명쾌했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 '포로다'는 것이었다. 또 일본인이 아닌 대한사람이기 때문에 일본 법률에 따른 변호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김창숙은 14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그때 잔인한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고 만 것이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쉼 없이 항일투쟁을 계속한다.
김창숙은 1962년 5월 10일 돌아가신다. 바로 며칠 전 박정희가 김창숙을 병문안했다. 얼마 후 84세로 생을 마감하자 박정희는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두 달 전 3.1절 행사에서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5.16 쿠데타 세력은 만주군, 일본군 출신이 다수였다.
평생 항일투쟁으로 살아온 김창숙이 군사정권으로부터 훈장을 받다니! 이 얼마나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그토록 찾고 일구려고 했던 '조국'의 모습이 멀어져만 가서였을까? 80 평생 꺾이지 않았던 선비 김창숙은 생을 마감하며 허무함을 토로한 시를 남긴다.
올해 나이 여든셋
우국충정 한 꿈에 그쳤으니
이제부터 세상사
말하지 않으리
순국선열 뒤 따라
저승에서 놀고지고
역사는 유산이다. 빚을 남기면 다음 세대는 빚을 갚아야 하고, 영광의 시대를 넘기면 다음 세대는 그 후광을 누리게 된다. 역사에 책임감을 느끼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중년의 김창숙은 상해로 갔다. 항일투쟁을 하는 사이 스승이 옥고를 치르다 죽고, 아들이 고문으로 죽었다. 그 뼈저린 아픔에도 그는 길을 바꾸지 않았다. 그 덕분에 우리는 해방된 나라에서 '대한민국'을 발전시켜 올 수 있었다.
심산 김창숙은 순례길에 잠들어 있다. 백련사로 오르는 이 길은 봄에는 새싹이, 여름에는 물소리가, 가을엔 단풍이 볼만한 계곡 길이다. 앞쪽 체육시설에는 항상 사람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조금만 오르면 되는 김창숙 묘소에는 갈 때마다 조용하다. 혼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올리기 좋은 장소이기도 하지만 쓸쓸함이 아쉽기만 하다. 잊히지 않게 간간이 닿는 발길들이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순례길 중에서 유림 묘소-김창숙묘소-양일동묘소는 백련사계곡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더 타고 오르면 진달래능선을 만나게 되고, 북한산성의 동쪽 문 대동문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