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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담아 Feb 26. 2024

봄이 오면 가리 2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부론면 현계산 거돈사지

인생은 운칠기삼이다


 

승탑의 주인공은 원공국사라고 한다. 일생을 살펴보니 운이 좋은 분이다. 


930년 출생
954~959 과거시험 중 승과 급제
959년 고려 광종의 지원으로 중국 오월국으로 유학을 감
968년 대정혜론 법화경 강의, 중국에서 명성을 얻음
1013년 현종 4년 왕사로 임명(당시 84세)
1018년 입적
1025년 왕명으로 승탑과 탑비 건립, 글은 최충이 글씨는 김거웅이 씀


태어난 해가 930년이다. 유년기에 혼란이 끝난 것이다. 삼국시대만큼 전쟁이 잦았던 시기가 892년 후백제부흥운동부터 936년 고려가 통일할 때까지 40년 간이었다. 삼국시대는 범위나 넓었지, 후삼국시대는 한강이남 좁은 지역에서 치고박는 전투가 벌어졌다. 만약 900년에 태어났다면 유년, 청년을 다 보내고 중년이 되어서야 평화의 시기가 찾아왔단 말이다. 남성이라면 전쟁터로 끌려가 죽었을 가능성도 없잖다. 이 얼마나 가련한 인생인가? 원공국사는 이를 잘 피해 갔다. 인생은 운칠기삼이다. 


원공국사 승묘탑비 (글 최충, 글씨 김거웅)

전쟁이 끝났다고 바로 평화가 오지 않는다. 전후복구의 기간이란 게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려는 내부의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왕건이 낳은 왕자가 25명. 그들 대부분은 백그라운드 든든한 외가의 세력을 등에 업은 호족의 외손인 왕자들이었다. 제2대 왕은 첫째 아들에게 넘겨주었으나 2대 왕 혜종은 요절했다. 혜종이 건강이 나빠 겔겔 거릴 때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24명의 왕자들의 왕좌의 게임은 치열했을 것이다. 최종 승자는 셋째 아들이었고 그가 고려 제4대 왕 광종이다. 광종은 조선 태종 이방원보다 더 치밀하고 과감했으며 잔혹했다. 광종 즉위년은 949년이다. 혜종이 승하한 945년 즈음부터 만약 관직에 있었다면? 줄 까딱 잘 못섰다가는 인생 황천길 가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공국사는 949년 만 19세로 청년기를 마치고 이 혼란 저 다툼 다 정리되자 딱 그 시점에 사회 진출한 것이다. 이 얼마나 운이 좋은가? 참, 인생 운칠기삼이다. 


볼거리가 넘쳐나 눈으로 보기 바쁜 답사지에서는 할 수 없는 생각들을 거돈사지에서는 한다. 고승을 두고 외람되이 하는 생각이랄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이야 사람 나름이니 누가 뭐란다고 개의치 않는다.


 

 

고려 왕은 불교를 후광으로 삼다



광종은 참 잔인했다. 왕권을 위협할 것 같으면 처가도 몰살시키는 왕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고려만의 기틀을 다지고 제도를 정비했다. 광종은 현실적이었다. 필요하다면 중국 제도를 모방하는데도 주저함이 없었다. 중국의 제도를 기초한 과거제도 전격 실시가 과감한 국정 실행력을 보여준다. 원공국사는 이 과거제도 실시에 따라 승과에 급제한다. 패기 넘치던 고려초기 젊은 엘리트 스님으로 세상에 나선 것이다. 광종의 노선을 지지하고 딴지만 걸지 않는다면 탄탄대로가 열렸다고 볼 수 있다. 


원공국사는 초엘리트로 광종의 사랑을 받았다. 958년 광종이 특별 선발발한 승려 36명에 끼어 중국 유학을 떠난다. 고려 건국부터 통일까지 협력자였던 불교계를 광종은 왕권중심으로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승려 36명을 유학 보내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킬 불교 종파를 연구해 오게 한 것이다. 그 후 원공국사는 고려 왕실을 위해 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난의 행로를 걸은 별 기록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정면이 아니라 아쉬운 원공국사 승묘탑비의 귀부

원공국사는 1012년 왕사가 되었고 1018년 입적한 뒤 국사로 높여졌다. 이 말을 통해 거돈사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려의 왕사와 국사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당시 최고로 추앙받는 고승을 왕이 임면 하는 왕사와 국사는 뚜렷한 위계가 없었다. 왕사나 국사는 왕이 신하를 보내 삼고초려 형식을 거쳐 스승으로 삼는다. 대개 한 시기에는 오직 한 명만이 왕사나 국사로 활동한다. 같은 시기에 2명 이상이 임명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위상을 갖는 자리인 것이다. 위계가 없던 두 직은 고려 광종 때 왕사 위에 국사로 위계를 정립한다.  대개 왕사가 입적하면 국사로 올렸다고 한다. 


거돈사에 국사를  모셨다는 이 절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또 왕명으로 승탑과 탑비를 만들고 비문을 최충이 쓰게 했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는 대목이다. 최충이 누군가? 수많은 인물 중 국사책에 나오면 두 말이 필요 없다. 고려 전기 최고 학자로 해동공자라는 별명을 가졌다. 배우겠다는 사람이 몰려 개성에 대형 사립학원 9개나 열었던 9재학당의 스승 아니던가. 요즘 일타강사와 비교가 안된다. 국무총리급 출신에 고시 합격을 좌우지하는 파워를 지니신 일타강사님이시다. 그런 분에게 왕이 비문을 쓰라했다면 원공국사님도 대단한 인물임을 짐작케 한다.




탑비에서 패기를 느끼다



스님이 입적하시면 다비해서 사리를 모신 탑을 승탑 또는 부도라고 한다. 원공국사 승탑은 사연이 있어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에 모시고 있다. 거돈사지에는 승탑비가 있다. 승탑비는 일단 웅장하다. 전체 느낌은 활달하고 패기 넘친다. 이 승탑이 만들어진 해가 1025년이라고 한다. 원공국사가 입적한 1018년은 고려 역사에서 중요한 해이다. 고려가 거란 3차 침입을 귀주대첩으로 대승을 거둔 해이다. 그 해에 세워진 탑비인 것이다. 그시절 고려인들이 가졌던 자부심, 당당함, 긍지가 탑비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고려의 거란과의 전쟁은 단순한 두 국가의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군사적으로 동북아시아 최강자는 거란이었다. 그런 거란에게 고구려의 후손이 세운 발해를 멸망시킨 너희는 우리의 적이다고 수교를 거부하며 맞선 나라가 고려이다. 마냥 적대강으로 맞선 것만은 아니다. 배짱있게 맞서 거란을 긴장시키고 송과 여진을 이용해 외교로 거란을 견제하며 동북아시아 외교 주도권을 지켜 나갔다. 긴장감이 팽팽했던 시대 때로는 맞서고, 때로는 외교로 유연성을 발휘하는 한편 거란의 침략을 대비한다. 1, 2차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고려는 3차 침입을 대비해 노장 강감찬을 중심으로 상비군 20만을 훈련시킨다. 그리고 거란군 10만이 3차 침입을 강행하자 귀주벌판에서 싹 쓸어버리는 대승리을 거둔다. 그 후 거란은 쇠약해졌고 감히 고려를 넘보지 못했다. 그 결과 동북아시아는 100년 간 평화의 시대를 열린다. 


전쟁의 시대를 마치고 찾아 온 그 후 약 100년은 고려에도 최고 전성기을 안겨준다.  


9세기 통일신라 말기에 처음 절이 들어섰을 때 세워졌을 거돈사지 3층석탑


우리가 몰라봐줬던 고려의 역사이다. 거돈사지에 오면 동북아 평화의 균형추 역할을 했던 고려의 역사의 웅기가 느껴진다. 현재 동북아시아에 감도는 분위기가 불안하다. 고려의 역사를 보면 우리가 지정학적으로 동북아 평화의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의 DNA가 있음을 천 년의 하늘을 품은 거돈사에서 다시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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