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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담아 Mar 08. 2024

명필따라 사찰여행-1

서울 강남구 수도산 봉은사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수도산 봉은사 일주문


마천루 같은 빌딩 숲 속, 옛날에 학벌께나 자랑했던 경기고등학교 옆에 봉은사가 있다. 작지 않은 규모에 여러 전각을 갖추고 있으며 한적하게 걸을 있는 명상길도 가꿔놨다. 조선중기부터 큰 절로 자리하고 있었으니 서울사람 중 인연이 있는 사람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지인은 일이 풀리던 시절 이곳에 자주 왔단다. 대웅전에 가만히 앉아 부처님을 뵙가면 일이 풀려서 좋은 기억갖고 있다고도 했다. 봉은사와 좋은 인연을 맺은 인물을 나는 또 알고 있다. 먼저 추사김정희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봉은사로 가는 이유 


화엄경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이곳에 현판 '판전'을 쓴 사람은 추사 김정희이다


"이것 보러 왔지요."

봉은사를 찾는 이유는 다양하겠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러 왔다고 한다. 


판전. 

봉은사 판전 앞에 서면 나는 마음이 짠해 온다. 


'71세 병중에 쓰다-완당' 


완당 김정희는 판전을 쓰고 나흘 후에 죽는다. 김정희 마지막 작품인셈이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면서 큰 숨을 모두어 한 획을 긋고 또 한 획을 그었을 그 순간을 느껴보려고 '판전' 두 글자를 가만히 바라본다. 당시 사람들은 추사체를 보고 괴이하다 했다. 아무렇게나 쓴 듯한, 틀을 깨 버리는 파격. 어쩌면 추사 김정희가 인생역정을 겪으며 도달한 해탈일지도 모른다. 


김정희의 인생 초반을 정리해 본다. 요약하자면 좋은 시절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랐는데, 심지어 영재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읽기 싫으면 건너뛰어도 된다. 


1786년 충청남도 예산 추사고택에서 태어나다.
정조시기 조선의 문예부흥이 무르익던 호시절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영조의 둘째 사위였다. 추사고택은 영조가 사랑하고 사랑했던 둘째 딸을 위해 궁궐 짓는 장인들을 보내지었다고 한다. 

1792년 7세 되던 해 박제가의 눈에 띈다.  
'입춘대길'을 쓴 김정희의 글씨를 보고 박제가가 제자로 삼는다. 박제가는 정조가 키웠던 '4 검서관'의 대표주자로 박지원과 함께 북학파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아버지 김노경도 박제가와 가까운 사이였다. 김정희 학문의 계통상 뿌리를 알게 해 준다. 

1800년 아버지가 종 3품에 이르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비였던 정순왕후가 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한다. 정순왕후는 경주김 씨 예산출신으로 김정희 집안과 각별했다. 아버지 김노경은 벼슬이 종 3품에 이르게 된다.  

1809년 장원급제한다. 
1806년 무렵 어머니, 아내, 스승 박제가가 세상을 떠난다. 3년상을 치른 뒤 장원급제한다. 과거시험 1등이라, 단지 집안만 좋았던 게 아니라 능력 또한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10년 청나라를 6개월 동안 다녀오다. 
아버지 김노경의 사신행에 자제군관으로 청나라에 간다. 청나라 최고 학자 옹방강에게 고증학을 배운다. 국제적 친분관계를 통해 세계정세의 흐름에 대한 감각까지 갖췄다. 

1816년 북한산순수비를 고증하다. 
청나라를 다녀온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증학에 빠진다. 북한산 비봉에 있던 비석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 냈다. 

1827년 효명세자의 스승이 되다. 
1819년 과거에 급제 병조참판에 올랐고, 조인영(효명세자의 처 삼촌)의 추천으로 효명세자의 스승이 되어 세자만의 학교인 시강원에 근무하다. 군사부일체다 말하는 조선사회에서 세자가 왕이 되면 탄탄대로는 열려 있었던 것이다. 



길이 막히고 끊어지다


김정희는 세자의 스승이었다. 그 세자가 누구인가? 영민하고 침착하며 신중하고 문과 예를 알아 정조의 대업을 계승할 것이라 촉망받던 효명세자가 아닌가.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김정희로서는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있는 탄탄대로가 준비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인생은 한 끗에 비끗하고 길을 잃고 마는 때가 있다.


1830년 효명세자가 22세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4세에 세자로 책봉되어 18년 세자를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한다. 안타까운 죽음이다. 개인의 삶도 그렇지만 우리 역사로도 안타까운 죽음이다. 세도정치로의 파행을 차단하고 바로잡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효명세자 죽음으로 헌종이 8세에 왕에 오르고, 강화도 도령 철종이 뒤를 이으면서 이후 30년 동안 부정, 부패, 무능으로  점철된 세도정치의 정점을 찍게 된다. 


김정희 인생의 시련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효명세자가 죽은 뒤 독재권력을 쥐고 무능하고 부패했던 정권 안동김씨에게 찍힌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다. 아버지 김노경이 유배를 가고, 김정희와 동생도 유배를 떠나야 했다.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정권에 찍히자 사람들도 가차 없이 등을 돌리고 떠나갔다. 남은 것은 외떨어진 섬의 찬 바람뿐이었다. 



절대고독이 추사를 만들다


<세한도>에서는 춥고 쓸쓸했던 제주도 유배생활이 잘 드러난다. 제주도 8년 유배생활을 거치며 그는 털어낼 것 다 털어내고 벗어던질 것 다 걷어내고 씻겨내 완숙함만을 품은 추사체를 완성한다.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1000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네'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고독했던 그의 시간을 말해준다. 무엇을 있었겠는가. 내 실력인 줄만 알았던 것이 집안의 후광이었으며, 내 영광인 줄 알았던 것이 시대의 빛 속에 있었음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어두운 시기를 거치며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여러 추사의 작품 가운데 봉은사 <판전>의 글씨는 추사체를 대표한다고 평가한다. 나는 글씨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평가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추사체를 보고 있으면 편안하다. 어린애가 쓴 것 같은 삐뚤빼뚤한 획에서 세상을 향한 해탈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틀에 박힌 조선사회를 향한 풍자? 그런데도 길을 잃지 않은 획들에서 그가 지키려 했던 정신을 느낀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끝내 버릴 수 없는 것들만 더 반듯하게 한 횡과 종의 획. 그리고 묵직하게 내려놓은 글자 끝에서 쓸쓸한 자유를 본다. 내려놓을 것 다 내려놓은 순간의 자유. 



변방에서 해방되다 


추사체를 집자한 서울 안국동 운현궁 노안당 현판

그의 고난은 그의 학문 계통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김정희는 박제가의 제자였다. 아버지도 박제가와 교유가 깊었다. 세도정치는 정조가 키운 세력을 숙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가장 약한 고리부터 죽어나갔다. 유교사회가 만든 이단 프레임에서 사문난적한 자는 죽어 마땅했다.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정약용 형제가 죽거나 유배됐다. 정파로는 남인이 다 숙청되었다. 다음은 북학파였다. 박제가의 경우 정조가 죽은 후 노론으로 전향했다. 그러나 역모사건으로 유배갔다가 1805년 풀려났으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김정희는 그나마 집안 배경이 든든해서 정조가 죽은 뒤 30년을 살아 남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력은 중심을 향한 구심력이 막강하다. 핵중심을 제외한 외부를 죽이며 힘을 키워간다. 


김정희가 권력으로부터 퇴출되고 진짜로 해방되었는지 자유로웠는지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다. 다만, 죽기 전에 살았던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봉은사까지 걸어서 3시간 30분 거리. 그의 말년에 위안을 주고 위로를 줬던 곳은 봉은사였다. 권력화된 어떤 종교나 사상도 시대의 대안이나 희망이 될 수 없다. 유학자가 스님이 되려고까지 했던 걸 보면 그가 마지막에 기댄 곳이 어딘지 알 수 있다. 



여담 - 판전 옆 '흥선대원군 영세불망비'


흥선대원군 영세불망비

답사를 하다보면 뜻하지 않은 만남을 할 때가 많다. '흥선대원군 영세불망비'라. 봉은사는 흥선대원군과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봉은사는 조선말기에 주변 농민들과 토지분쟁이 있었단다. 그 분쟁을 흥선대원군이 나서서 해결해 줬다. 그것도 봉은사 편을 들어 깔끔하게. 그래서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영세불망비'를 세우게 됐단다. 


흥선대원군은 왜 봉은사 편을 들어줬을까 궁금해진다. 봉은사는 왕실의 능을 지키는 원찰이다. 가까이 있는 선릉(성종릉)과 정릉(중종릉)을 보호하고 두 선왕의 명복을 빈다. 그러니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원찰인 봉은사 편을 들어준 것 같다. 


판전 가까이 있는 '흥선대원군 영세불망비'를 보며 인연의 연결성을 본다. 흥선대원군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다. 안동김씨 세도권력이 하늘을 찌를 때 흥선군은 몸을 낮춰 건달처럼 생활한다. 남인계통이던 흥선군이 괜히 깐족대다간 숙청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야망이 있었다. 김정희를 찾는다. 사제지간의 관계는 그렇게 이어졌다. 흥선대원군은 특히 난을 잘 그렸다. 추사 김정희도 압록강 동쪽에서 난은 흥선이 최고라고 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 난은 그의 호를 따서 특별히 '석파란'이라고 했다. 


한 시대 인물은 한 단면으로만 해설될 수는 없다. 이것을 보라. 흥선대원군은 풍양조씨 조대비(효명세자빈)과 특딜을 했다. 둘째 아들 명복을 효명세자 아들로 입양해 철종 다음을 승계하게 한 것이다. 김정희는 효명세자 스승이었고, 효명세자 처삼촌 조인영과 인연이 깊다. 재밌지 않은가? 나만 재밌나?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에는 봉은사 소개글에서 별로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 쓴 현판을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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