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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담아 Mar 16. 2024

명필 따라 사찰여행-2

서울 강남구 봉은사



절에 가면 절을 하자


 

서울 봉은사 대웅전 앞 계단에 새겨진 용 조각

절에서 중심공간은 대웅전이다. 절에 가면 먼저 대웅전에서 인사를 드린다. 합장을 하거나 삼배를 하거나. 답사객은 지나가는 행인이다. 답사할 공간에 내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조용히 보고 흔적 없이 가겠습니다. 

 공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봉은사 대웅전 목조 삼세불 좌상은 보물이라고 한다. 조선후기 작품이다. 가운데가 석가모니불, 왼쪽 오른쪽이 아미타불과 약사불이라고 한다. 아미타불은 죽은 다음 세상을 이끌어주시는 부처님이고 약사불은 아프고 병든 이를 구해주시는 부처님이다. 생로병사의 두려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을 수밖에 없는 부처님이다. 


대웅전을 나오면 계단 중앙에 용이 새겨져 있다. 봉은사가 왕실과 관계가 깊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드디어 찾았다 



3층 석탑 앞에서 합장을 하고 뒤를 돌았다. 2층 누각이 있다. 현판을 가만 읽다가 반가움에 마음이 환해진다. 

'오세창'

여기 있었구나. 이 현판을 찾으러 오늘 봉은사를 온 것이기 때문이다.  


왼쪽에서 읽어나가면 선종종찰 대도량 불기 2970년 오세창이라 쓰여있다


위창 오세창은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개화기, 일제강점기 인물로 결코 잊혀서는 안 될 인물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며, 손병희를 도와 3.1 만세운동 성공을 도운 참모였다. 독립운동가로서 1948년 8월 15일 가슴 벅찬 대한민국정부수립을 위해 대한민국정부수립국민축하 준비위원회의 회장으로 기념식을 준비하고 기념사를 낭독하신 분이 위창 오세창이다.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해방공간에서 여러 정치세력이 서로 모셔가려고 했던 존경받는 큰 어른이었다. 


손병희가 3.1 만세운동을 준비했던 서울 강북구 우이동 봉황각이다. 현판은 오세창이 썼다.


한편, 오세창은 한국미술사에 큰 어른으로서 묵직한 역할을 하고 가셨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간송전형필의 문화재 선생이었다. 전형필의 문화재 수집은 목표가 있었다. 해방 후 우리가 우리 문화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가치를 가진 것을 수집한다. 그 안목을 오세창에게 배웠다. 오세창도 수집가였다. 수집과 연구를 통해 여러 연구서를 남겼다. 한국미술사학도라면 오세창을 거치지 않고 학문에 입문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선생님의 연구가 없었다면 한국미술사 연구가 불가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제강점기 잃어버릴 수 있었던 우리 정신적 자산의 맥을 이어놓았기 때문에 해방 후 한국미술사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어느 날 만해 한용운은 오세창을 찾아 사흘 동안 그의 수집품을 감상한다. 흔히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고 예술은 영혼의 양식이라고 한다. 한용운은 우리 미술품을 보고 나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위창이 모은 고서화들을 볼 때에 대웅변의 연설을 들은 것보다도, 대문호의 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큰 자극을 받았노라. 만일 훗날 조선인의 기념비를 세울 날이 있다면 위창도 일석(一石)을 차지할 만하도다.”  - 경향신문, 유홍준의 안목 (8) 나라의 큰 어른 위창 오세창에서 재인용



역사는 흐른다



오세창은 문화재 감정에서 최고 권위자였다. 진짜냐 가쨔가 감정에서 오세창이 맞다면 맞는 것이고, 작가가 누구냐는 추정에서 오세창이 누구다라고 하면 그런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오세창의 이런 안목은 아버지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오경석. 중국어 통역관으로 중국을 오가며 명필과 고서적을 수집했고 그의 사랑방에서는 감상회가 자주 열렸다고 한다. 오세창은 어려서부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안목이 키워졌던 것이다. 


오경석은 13차례나 중국을 오가며 통역한다. 역관은 단순한 통역만 하지 않았다. 상대국의 정세를 살피고 의중을 파악하는 첩보원 역할도 해야 한다. 19세기는 세계정세가 숨 가쁘게 돌아가던 때였다. 조선으로서도 프랑스, 영국, 미국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다. 오 경석은 명민하고 신뢰할 수 있는 역관이었다.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며 일찍 세계정세에 눈을 뜬다. 그래서 병인양요 때 흥선대원군의 믿을 만한 조언가로 역할을 한다. 오경석은 프랑스군은 국가차원의 군대가 아니니 방어만 잘하면서 장기전을 하면 승산이 있다고 했다. 그의 조언은 적중했다. 신미양요 때도 흥선대원군이 도움을 청한다. 그때 오경석은 세계정세를 반영해 개항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그를 멀리했다. 조정대신들도 개항을 주장했다며 그를 꺼려했다. 


오경석은 중인인 역관으로 한계를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서 한양 북촌에 사는 명문가의 아들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을 했는지 모르겠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을 받아 실제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과 같은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모두 오경석의 제자들이다. 


끝까지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제자 이상적에게 추사 김정희가 그려 준 <세한도>


웬 뜬금없는 세한도인가 싶을 것이다.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 가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끝까지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제자가 이상적이다. 이상적은 중국어 통역관이었다. 중국에 가면 구하기 힘든 책까지도 수집해 가져와 제주도에 있는 스승 김정희에게 보내곤 했다. 김정희는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을 따와 <세한도>를 그려서 제자에게 선물한다. 


이상적은 오경석의 스승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정신은 김정희 - 이상적 - 오경석 그리고 오세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세한도>는 원래 작은 그림인데 길이가 14미터나 된다.  <세한도>에 감동한 20여 명의 감상글 20여 편이 덧붙여졌기 때문이다.  감상글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가장 마지막 네 번째에서 인연의 긴 이어짐을 발견한다. 3편의 감상평 가운데 오세창의 글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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