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 정독도서관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줄어간다
너와의 시간
이제 곧 하지다
- 나가타 가즈히로의 단가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걷는 듯 천천히> 첫 번째 에세이에서)
단 네 줄로,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 마음이 밀려와 내 마음을 채운다. 확 밀려오는 감정을 봄 햇살마저 부추기니 주체할 수가 없어 길을 나선다. 오늘은 북촌으로 가볼까. 북촌에서는 일부러 좁은 길로 다닌다. 느리게 천천히 사브작거리며 천금 같은 시간을 누려 보려는 마음이다.
북촌에서도 봄에 어울리는 동네는 화동이다. 꽃이 만발했다고 花開 화개, 화동은 조선시대 꽃을 길러 궁궐에 바쳤던 장원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햇빛이 닿기만 하면 팡팡 터지는 봄날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이끌려 나왔다면 어찌 가지 않을쏘냐.
북촌은 보고 스쳐가는 관광이 아니라 들어가 시간을 보내 보는 여행을 해야 하는 동네다. 화동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 좋은 장소는 정독도서관이다. 대개는 지나치는 이곳에 들어가 보시라. 편하게 쉬었다 가기 좋은 곳이다. 서울살이를 오래 한 사람이라면 청년시절 수험서 들고 한 번쯤은 와 봤을 곳. 청춘의 꿈, 방황, 불안이 함께 했던 기억을 나도 가지고 있다.
사브작사브작 잔디밭을 걷다 표지석을 발견한다. 김옥균집터. 실은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보태져야 한다. 서재필의 집터 표지석이다. 두 집안은 이웃하고 살았다는데 쟁쟁했던 명문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정변을 일으킨 역적 집안은 씨를 말리고 집을 허물어 연못을 파 역모의 기운을 없앴다고 하니 흔적이 있을 리가 없다.
1894년 '대역부도 김옥균'의 목은 장대 끝에 걸려 전국을 떠돌았다. 몸은 여섯 도막 내는 육실의 형벌을 받았다. 죄보다 벌이 더 잔혹했던 죽음이었다.
역사는 시대마다 숙제를 준다. 시대적 과제인 셈이다. 시대 과제를 위해 나가는 한 걸음에는 언제나 참수가 함께 했다. 구태와 적폐를 부수고 새 세상으로 나가려 꿈을 꾼 자에게 세상은 항상 불온하다 했다. 감히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 펼치면 역모라 하여 목가지가 잘리고 걸리는 참혹함을 겪었다.
역사에서는 시대 과제를 위해 기꺼이 도구가 되려는 자와 시대과제를 도구로 삼는 자가 있다. 도구가 되려했던 많은 이의 목이 잘려 나갔다. 도구로 삼으려는 자들은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래도 역사는 도구가 된 자의 꿈이 언제가 끝내는 실현되어 현실이 되어 꾸역꾸역 지금까지 왔다.
죽어나간 사람들에 대해 후대는 평가를 한다. 그러나 시대적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인물은 없다. 다만 시대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온몸을 다한 사람은 있다. 쇄빙선이 되어 시대를 돌파할 수 있는 길을 낸 사람들의 나는 그들의 꿈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김옥균은 재기 발랄한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천재끼가 뿜뿜 했다. 생부는 재능을 키우기 위해 아들을 양자로 보냈다. 양부는 북촌 홍현에 사는 장동김 씨 김병기로 '홍현댁'이라고도 불렀다. 김옥균은 이 집에서 잘 양육되고 교육받아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물로 자랐다. 별 일이 없었다면 아마 그렇게 평탄하게 살았을 것이다.
세계관의 확장은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시작된다. 김옥균이 청소년기를 보내던 시기는 해마다 뒤숭숭한 사건이 일어났다. 15세였던 1866년에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났고 곧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도 함대가 다가오고 포격이 시작된 것이다.
18세가 되던 1869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지휘했던 평양감사 박규수는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온다. 그때부터 김옥균은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었다. 재야 선각자 유대치와 청나라를 오가며 세계문물에 접한 오경석, 일본소식통인 개화승려 이동인을 만났다. 그리고 조선 너머 뜻밖의 세상을 접했고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변화에 눈을 떴다.
충격을 잘 흡수하고 통찰한 김옥균은 매력적인 청년이 된다. 신분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인간관계에서 보여주는 세계관, 세계 변화를 직관하는 통찰력, 조선의 한계를 뛰어넘는 선진적인 지식과 안목. 새롭게 나갈 비전을 제시하는 열정.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던 청년들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집결했다.
21세 김옥균은 문과 알성시에 장원급제한다. 정계에 진출 뜻을 펼칠 기회를 만난 것이다. 그때가 1872년, 1년 후인 1873년 고종이 직접 정치일선에 나선다. 고종은 개화에 관심을 보인다. 단박에 김옥균을 좋아했고 의지했다. 둘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돈독했다.
김옥균에게 꿈을 펼칠 길이 열린 것이다. 김옥균은 1874년 충의계, 개화당을 만든다. 개화에 뜻을 같이한다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함께 했다. 그러나 개화는 아직 불온한 사상이었다. 개화는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며 재야 유생들이 파르르 떨었다. 그래서 개화당 청년들은 서대문 봉원사에서 몰래 개화 관련 서적을 읽고 토론했다. 청나라 영향을 받는 굴욕에 분노했고 어서 평등한 세계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됐다. 개화는 대세가 되었다. 일본으로 간 수신사와 청을 다녀온 영선사가 보고서를 올렸다. 다시 일본으로 시찰단이 파견되고 보고서가 올라왔다. 김옥균은 직접 현장을 보고자 했다. 그는 생가와 양가 재산 그리고 후원금 2만 엔을 마련해 일행과 함께 일본으로 떠난다. 나가사키 조선소와 제련소, 탄광과 채굴기계들을 접한다. 교토, 고베를 거쳐 도쿄에 이르러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일본인사도 두루 만난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그 후 변화를 목도한다. 그리고 일본 인사들이 '정한론'을 주장한다 것도 알게 된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6개월의 시찰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김옥균은 한 발 늦은 조선이 빠르게 개화하려면 일본을 모델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기술도입이 아닌 체제 전체를 바꿔야 한다, 그리고 주권국으로서 독립국이 되려면 청년들의 실업교육과 군사교육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서재필을 비롯한 17명의 청년을 일본 군사학교에 보내고 또다시 60여 명을 발탁해 일본 유학을 보낸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에게는 사방이 적이었다. 개화는 망국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 척사파가 있었다. 조정에는 부정부패를 일삼는 무능한 외척이 왕비 민 씨를 앞세워 실권을 쥐고 있었다. 개화파도 분열하고 있었다. 조선의 체제개혁을 요구하는 개화파를 급진적이라며 체제를 유지한 체 개화흉내만 내려는 온건적인 개화파가 내부의 적이 되었다. 그들은 결코 기득권을 포기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척과 손잡고 개화정책을 방해하며 수구세력이 되어 갔다.
김옥균은 점차 고립되어 갔다. 외척과 온건개화파들은 조정의 정책실패를 김옥균 탓이라고 추궁했다. 임오군란 배상으로 재정이 파탄 나자 청나라 고문 묄렌도르프는 당오전을 발행하라고 한다. 김옥균은 당백전 사례를 들며 물가폭등으로 민생을 위협한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정부는 당오전을 발행했고 물가는 앙등했다. 외척과 수구세력은 이것을 김옥균 탓이라고 떠넘겼다. 재야에서 날마다 김옥균을 내쫓으라 상소가 올라왔다. 임금은 강단이 없었다. 이리저리 휘둘렸다.
조정 안팎의 압박으로 북촌 집에 칩거할 때 자객이 수시로 목숨을 노렸다. 아마 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절망에 빠진 김옥균이 혁명을 계획한 것은.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후 망명객으로 10년, 그 사이 임금은 끊임없이 자객을 보낸다. 수많은 암살객을 간신히 피하고 살다가 1894년 상해에서 살해당한다. 그토록 돈독했던 임금이 보낸 홍종우라는 자객이었다. 고종은 갑신정변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오히려 묵인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정변 5일 전 김옥균은 임금을 만났다. 청군과 일본군의 접전이 있을 것이며 모종의 변란이 있을 것을 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임금은 왜 그렇게 암살객을 수도 없이 보냈을까? 무엇이 그렇게 사무쳤을까? 정변 이틀간의 일이다.
갑신정변 1일
개화당은 우정총국에서 정변을 일으킨 뒤 고종을 경우궁에 가두고 대신 6명과 고종이 총애하던 내시 1명을 죽인다. 왕은 "죽이지 마라"라고 연거푸 말했다.
그리고 내각을 교체한다.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그리고 김옥균 개화당이 병권과 재정권과 외교권을 거머쥔다.
갑신정변 2일
개혁 정강 14조를 발표한다. 김옥균이 주장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고 끌려간 흥선군 환국시키고 청나라 조공은 폐지한다.
신분제도와 문벌 철폐하고 인재의 공평한 등용, 공개채용시험 도입한다.
재정은 호조에서 통괄한다.
왕실과 국가업무를 구분한다.
공채발행으로 재정을 충실하게 한다.
지조법(토지제도) 개혁하여 세수를 충실하게 한다.
임금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두려웠던 것이다. 개화당은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다. 전제왕권의 임금이 더 이상 지존일 수 없는 세상을 향해 그들이 걸어갔던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140년 전 그의 주장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그의 주장이 그 시대에 공감을 얻어 조선의 변화를 이끌어냈더라면 조선 끝이 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변은 실패했다. 청군이 개입해 그들을 진압했고, 국왕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고, 일본군은 불리함을 알고 약속을 어겼다. 실패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왕비 민 씨와 외척 그리고 수구파가 임금을 가둔 역적을 어서 잡아 죽이라고 했고, 척사를 주장하던 재야 유학자들은 일본과 손잡고 패륜을 저지른 그들을 처단하라 했다. 무엇보다 그를 물러 서게 한 것은 궁궐 밖에서 백성들의 맹렬한 비난이었다.
김옥균은 역적이 되어 참수되어 장대에 목이 걸렸다. 그는 실패했는가? 역사에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행착오가 있을 뿐. 그래서 그 너머라는 표현을 썼다.
갑신정변 10년 후 신분제 철폐와 토지제도 개혁은 동학농민운동의 농민들의 요구와도 일치했다. 1894년 갑오개혁에서 개화당의 주장은 실현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신분제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는 다시 입헌군주제를 주장했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주권재민의 시대를 열고자 했다.
우리 역사는 변화의 바람이 부는 분기점에서 길을 잃곤 했다. 개화기에 그랬고, 해방 후에 그랬다. 그리고 빙빙 돌아 고단한 질곡을 견디고야 제 길을 찾았다. 길은 한 사람이 간다고 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걸어야 길이 된다. 시대를 여는 것은 어떤 선각자일지 모르나 시대의 길을 내는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어느 길에 발걸음을 보탤 지 고민과 선택은 그 시대인들의 숙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