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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Jan 31. 2024

문과 여자의 인생 공부

씩씩하게 늙어가기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다니던 글쓰기 교실의 독서 과제로, 책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만났다. 내가 사는 세상에 이토록 깊고 다양한 일들이 펼쳐지고 있었다니! 짧고도 길었던 십몇 년의 인생. 숲 속에 살며 내내 나무껍질만 보다, 톱으로 자른 나무의 단면과 뽑힌 뿌리를 봐 버린 느낌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내 숲의 나무꾼이 되어 준 유시민 님이 정부와 국회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어른이 되었고, 함께 노화를 겪게 될 즈음 그는 은퇴하여 전업 작가가 되었다.


 같이 나이 드는 형편이니 이제 오빠라 불러도 될까. 시민이 오빠의 책을 읽으며 따뜻한 문체 너머 날카로운 인식을 존경하면서도, 그의 행복이 칼날에 베이지 않기를 응원했다. 몸도 마음도 건강히 오래 살았으면, 그래서 계속 좋은 글을 써 주었으면. 그가 집필한 책 속에는 배울 것이 많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익히고 오래 사유하면 세계를 깊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유럽 도시 기행).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글쓰기 특강),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배우기 위해 씨름하는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를. 빛나는 그의 책 중에 ‘문과 남자’와 ‘과학’을 모두 동경하는 나의 취향 저격,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이 책에 따르면 나는 운명적 문과다. 학창 시절 수학 점수까지 따질 것도 없다. 일상 속 문제 상황에서 명확한 답을 찾아 집요하게 고민하며 때론 수면을 전폐하는 이과 남편의 모습이나 (세상 일엔 원래 정답이 없는 거 아님?), 소파에 누워 멍을 때리다 특정 수의 성격을 발견하거나 수 끼리의 관계를 알아내고는 세상 모두가 공유하는 상식을 알아낸 듯 반가워하는 큰 딸의 모습 (좋겠다, 저절로 알게 되어서.)에 거리감을 자주 느끼며 더욱 알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도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될 것이다.

 시린 겨울밤, 경북 오지의 할머니 댁 마당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다가 오랜 외로움의 실체를 깨달으며 소름이 돋고 귀(라고 쓰고 마음이라고 읽는다)에서는 위풍당당 행진곡이 울려 퍼지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우리는 같은 세상을 다르게 여행한다.


  내 삶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아름다운 것들- 자신에 대한 믿음, 이웃에 대한 감사, 서로를 아끼는 마음의 표현을 계속 발견해 내는 과정이었다.


 내 사유의 방식을 한 문장으로 쓰고 보니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절망과 고통이 있는데 회피적 사고방식은 아닐까, 고민이 될 때도 물론 있다. 맘이 불편해지면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친절을 찾아 행동한다. 이것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키는 나의 무기이자 내 삶의 답임을 알면서도 때론 통찰력이 있는 조언, 다른 삶의 방식이 궁금하다. 그래서 계속 책을 읽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만난 순간 나는 크게 상처받았다.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들의 대공 암살로 시작된 세계 1차 대전, 자신을 부수며 뒤틀린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던 말콤 엑스의 삶. 시민이 오빠가 알려주는 역사와 그것을 만든 개인의 삶은 아프면서도 알고 싶은 공부였다. 그 상처 자국에 새 살을 돋우며 더욱 풍성한 나무가 되고 싶었다.


 날카로운 지성으로 독자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 유능한 문과’. 그가 환갑의 나이에 스스로를 ‘운명적 문과’라며 다소 슬프게 선언을 하고 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문과를 위한 교정용 렌즈가 되어 (또 다른 문과인이 보기에) 꽤나 깊이 있는 과학 교양 서적을 써냈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에는 몇십 권에 달하는 과학서적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문과용으로) 번역한 지식, 저명한 과학자들에 관한 일화와 함께 과학 공부를 통해 뇌의 새로운 회로를 만들고 성장하는 기쁨이 쓰여 있다.


 과학의 뿌리인 물리학- 난해한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까지 수박 겉핡기식일지라도 같은 문과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 불분명하다는 사실만이 확실한 물질의 세계를 관찰하고 사유하는 사명이 곧 행복이었던 과학자들의 인생에 바치는 존경. 이 지적인 책을 읽으며 시민이 오빠의 배움을 따라가다 숨길 수 없는 문과 갬성을 읽고는 뭉클해지고 말았다.


 나 또한 운명적 문과로서 책에 소개된 과학적 발견 중 몇은 이해가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것을 끊임없이 의심한 과학자들의 날카로운 지성과 그 누구의 것이라도 더 합리적인 것에 권위를 부여하는 정직함은 뚜렷이 확인했다. 그 태도를 내 안에 담기 위해 인식의 그릇을 키워가고 싶은 맘이 간절하다.

 

 더 일찍 과학을 알았다면 세상을 바로 보는데 들었던 수고를 줄일 수 있었으리라는 작가의 고백. 인문학에서 역사와 사회가 준 상처의 치료약을 찾으며 고군분투했을 문과 남자의 젊은 시절을 그려본다.


 색즉시공으로 일맥상통한다는 현대 물리학을 공부하며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내 몸의 원자와 나의 뇌가 느끼는 감정들을 더욱 귀하게 여기게 된다. 나를 현재 속에 더욱 충실히 살게 하는 과학 공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미처 몰랐던 것을 받아들이는 유연함으로 오늘도 새로운 신경회로를 만들며 함께 성장하는 우리.

씩씩하게  늙어가는 사람들을, 빛을 내며 소멸해 가는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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