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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Feb 05. 2024

지금, 이곳이 성지

귤다방에서 어반스케치를 배우다

 조천의 작은 마을, 400년 된 할아버지 팽나무를 끌어안은 로터리가 있다. 대흘초등학교에서 로터리를 돌아 아홉 시 방향으로 향하면 그곳에 곱은 달길. ‘숨은 달’과 ‘아름다운 달’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좁은 길가에 귤다방이 있다.

 귤 밭 산책을 하는 한가로운 닭 부부가 유정란을 낳으면 라면에 넣어 끓여 먹는 곳. TV 동물농장에 나온 염소 삼 형제가 오손도손 나이 드는 곳. 아기 래브라도 다섯 남매가 볕이 잘 드는 곳에 한 덩이로 누워 깊이 낮잠을 자는 곳. 여름엔 귤꽃 냄새를 맡으며 책을 읽고 가을엔 화덕 곁에서 군고구마를 먹으며 재즈 공연을 보는 곳.


 이 재미난 동네 다방에서 일상 속 도시나 마을 풍경을 그리는 ‘어반 스케치’ 수업이 있다 하여, 남편, 두 딸과 함께 출동했다.

 

 먼저 도착한 다른 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선생님이 펼쳐 두신 스케치북을 살펴보았다. 몇 년간 그리셨다는 어반 스케치 작품들. 붉고 하얀 등대 뒤로 노을 지는 하늘, 파도치는 항구 위 느슨하게 묶인 고깃배, 낡은 간판을 단 구멍가게와 그 곁의 비자나무, 돌담 뒤 귤 밭과 한편에 놓인 붉은 지붕의 창고 등 제주의 마을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풍경을 새삼스레 그린 그림이 잔잔하면서도 선명했다. 아래에는 그린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는데 몇몇 그림 밑에 ‘퇴근 후’라는 메모가 눈에 띄었다.


 비 오는 날씨 덕에, 거리에 나가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는 수고로움은 미뤄두고 선생님이 미리 찍어두신 마을 사진 중에서 한 장을 골라 그리기로 하였다.

 시작 전에 어깨너머로 그리는 법을 배울 수 있게 시연을 해주셨는데 선생님의 그림 도구가 단출한 것이 눈이 띄었다. 펜 한 자루, 사탕 상자였을 법한 작은 틴 케이스에 든 여섯 색의 물감, 짧은 붓 몇 자루와 엽서만 한 스케치북 한 권. 도구가 들어가는 가방 또한 손바닥 크기의 크로스백으로, 어반 스케치가 무엇보다 기동력을 필요로 하는 회화 장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펜이 지나간 자리에는 몇 개의 선이 남아 길 위의 풍경들을 묘사했다. 몇 분 만에 스케치가 끝나고 굵은 붓이 슥슥 면을 채우자 금세 평화로운 김녕의 마을 풍경이 종이에 펼쳐졌다. 세밀한 묘사는 펜이, 과감한 색 표현은 수채물감이 담당하며 빠르면서도 매력적인 표현이 가능한 기법! ‘참 쉬운’ 그림을 선보인 밥 로스 아저씨의 TV 프로그램을 볼 때처럼, 나도 빨리 저렇게 그려보고 싶다는 의욕이 솟아났다.

 어떤 장면을 그릴까, 선생님이 보내주신 사진을 살펴보다 건물의 구도가 안정적이고 하늘색이 아름다운 제주 바닷가 집의 풍경을 골랐다. 잘 찍어주신 사진을 그대로 따라 그리기면 하면 되니 치트키를 쓴 셈이었다. 그래도 펜으로 바로 그리기가 조심스러워 언제든 수정할 수 있게 연필로 먼저 묘사를 했다. 귤다방에 오는 길에서만도 여러 번 지나쳤을 법한 돌담 안 푸른 슬레이트 지붕 집. 그리려 하니 더욱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돌담을 이루는 각기 다른 모양의 현무암, 집 주변의 잡초, 벽의 얼룩과 무심히 걸린 테왁의 모양. 비슷한 집들 사이에서 그 장소만이 가진 개성과 이야기가 하나씩 눈에 띄었다.


 4년 전, 제주로 이주하였을 때 새로운 나무의 종류, 돌의 모양, 꽃의 향기를 살피느라 눈을  두는 모든 곳이 새롭고 놀라웠다. 익숙함에 무뎌져 잠시 잃었던, 처음 보는 것을 제대로 살피는 눈, 열린 감각을 되찾은 기분. 이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도 매일 익숙했던 풍경을 새롭게 보고 있으리라.   

 정성을 다하여 경계를 그은 후, 여러 번 살피어 색을 만들고 얹으며 생각한다. 이렇게 순간의 작은 힘을 다하며 매일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싶다고,


 참가자들의 서툰 그림을 봐주고 장점을 찾아 격려해 주던 선생님은 어반스케치를 시작하고 활기를 얻은 수강생들의 소감을 전해주었다. 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하며 제주의 아름다움을 스치기만 하다,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리며 더 행복해진 자신의 이야기도.

 어반스케치를 하게 되면 일상의 풍경이 소중해지고, 사진이나 그림으로 담기 위해 주변을 잘 살피게 될 것 같다는 나의 고백에 덧붙이신다.


 “맞아요, 그게 어반스케치의 매력이죠. 무엇보다 여러분은 어반의 성지 제주에 살고 계십니다.”


다른 곳이 아닌 지금 이곳이, 누구보다도 나에게 성지임을 알게 되고

지난 추억이나 꿈꾸던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특별하고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손바닥만 한 내 마음 안에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곁에 있는 지금.

온갖 무해한 것들로 순간을 누릴 수 있는 여기. 나는 제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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