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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Feb 16. 2024

라이프 라이터

천천히 쓰는 삶

 일주일 넘게 이어지던 겨울비가 그치고, 햇살이 집안에 드는 아침. 생기있게 푸른 하늘 빛에 힘입어 오랜만에 마음에 힘이 나고, 손끝으로 기운을 옮겨 키보드에 얹어본다.


 글 쓰는 엄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인이, 자기도 이야기책을 만들고 싶단다. 그림이나 글 중에 어떤 걸 먼저 만들어볼까 물어보니, 글을 먼저 써 보겠다고 하였다. 컴퓨터는 엄마가 쓰고 있으니 노트나 아이패드에 쓸 수 있겠다 하니, 자기도 엄마처럼 컴퓨터로 써야 잘 써질 것 같다며, 조바심이 나는 표정.


 짓궂은 맘이 생겨, 일부러 더 한참 키보드를 치는 나를 한동안 지켜보다 자기 아이디어를 까먹을 것 같다며 걱정이다.     


 “엄마는 아무데나 써도 잘 써지니까 양보해 줄게.” 여유를 부리며 넘겨주니, 귀한 기회를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듯 컴퓨터 앞에 자세를 잡고 앉아 몇 시간 째 열심이다. 물론, 가끔 집중이 끊기기도 한다.

 “엄마, 배가 꾸륵꾸륵 똥꼬에 신호를 보내는 거 같아요.” 하더니 화장실에 푸르륵 다녀오기도 하고

 “엄마, 뭐 먹을 거 없어요? 맛있는 거 먹고 싶다요.” 창작 노동으로 당이 떨어졌는 지 요구사항이 많아진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써요?”      


 엄마도 엄청 오래 걸릴 때도 있다고, 이 짧은 글도 어제부터 쓴 건데 아직도 마무리가 안 되었다고 하자, 그게 아니란다.  

 “하유... 친구들은 나보다 더 빨리 쓰던데... 답답해.” 


 타자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못 따라간다는 소리? 이 무슨 작가의 로망인가.     

 “생각이 타자보다 빠르다니 엄마는 완전 부럽네?” 했더니 그게 무슨 소리 냔다.

 “손가락을 빨리 움직이는 건 자꾸 쳐보고 연습하면 저절로 되잖아. 깊은 생각을 잘 읽히도록 옮기는 게 어려운 일이지.”

 “피아노 칠 때처럼요? 학원에서 연습할 때 머리로는 천천히 치자 하는데 손이 말을 안 듣고 자꾸 혼자 빨리 움직여요. 그럼 선생님이 왜 그렇게 빨리 치녜요.”     

 맞아. 빨리 치는 것은 어렵지 않아, 계속 조금씩 써나갈 테고 어느새 능숙한 네 손도 보게 될 거야. 격려하자, 엄마 우리 그거 들을까요? 한다.     

 

 제목을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음악인지 알겠다. ‘타이프 라이터’.      

 고장난 시계, 썰매타는 사람, 느긋하게 움직이는 고양이 등 일상 속 소재에 영감을 얻어 아름다운 곡을 쓰는 르로이앤더슨의 작품.

  ‘타이프라이터’에는 엄청나게 빠른 타악기가 등장하는 데 바로 타자기다. 16분 음표에 맞춰 쉴새 없이 타자 치는 리듬이 들리고 곧, 다음 줄로 넘어가는 ‘띵’ 소리도 유쾌하다. 빠른 타자 소리 너머로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상상해본다. 스릴 만점의 모험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 급박한 전보일지도.      


 그러나 결국 우리를 미소짓게 하는 건 타자기가 치는 글이 아닌, 작곡가의 재치. 

 긴장 가득한 일터의 소리에 밝고 사랑스러운 음색을 얹으며 그는 말한다.  뭐 그리 바쁘게 사냐고, 가끔은 조바심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라고, 귀엽고 재미난 것들로 가득한 삶의 순간을 기쁘게 누리라고.


 살피고 챙기며 해내야 할 일로 가득한 세상살이의 틈, 잠시 숨돌리는 시간. 그 순간만큼은 서툰 타자 솜씨를 오히려 반기며 천천히, 생각도 창작도 느긋하면 좋겠다.


 빠른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느린 만큼 깊게 슬프고 기쁘며. 온전한 삶을 즐기는 우리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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