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와 조국을 사랑한 음악가, 로스트로포비치와 비슈네브스카야
심포지엄 중 독특한 유럽 스타일의 영어 발음으로 질의응답 시간을 채워주었던 Dr. R은 자신의 발표 차례가 되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속한 재단을 이야기할 때면 사람들이 꼭 두세 번은 다시 묻는다. 그러나 발음이 어려워도 꼭 기억해달라. [로스트로포비치-비슈네브스카야 재단]이다.”
이 이름도 어려운 [로스트로포비치-비슈네브스카야 재단 Rostropovich Vishnevskaya Foundation, RVF] 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생소한 재단이었다. 소련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위대한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러시아 최고의 소프라노였던 그의 아내 “갈리나 비슈네브스카야”가 함께 세운 재단이며 본부는 미국 워싱턴 DC에 있다.
유년 시절부터 첼로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로스트로포비치는 16세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쇼스타코비치의 지도를 받았다. 그의 스승인 쇼스타코비치가 구소련의 공산주의에 반대해 교수직을 박탈당했을 때, 로스트로포비치는 이에 반발했으며 학교를 그만두었었다. 각종 대회를 통해 그의 실력은 입증되었으며 1956년부터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교수로 활약하며 연주 활동을 지속해, 1964년 레닌상을 1966년에는 [민중에 공헌한 예술가]라는 찬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를 집필할 당시, 그를 보호하고 공산당 서기관과 언론에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던 그와 아내는 소련 정부의 감시를 받는 감금 생활을 하게 된다. 연주 활동에 제약이 있던 그는 1974년 스위스로 단기 체류 허가를 받아 나오면서 결국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1977년 그는 워싱턴의 국립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소련 시민권은 박탈당하게 된다. 그의 음악적 업적과 명성을 인정하는 수많은 나라들에게 시민권 제안을 받았지만 1990년 러시아 국적이 복권될 때까지 ‘무국적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에겐 첼리스트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11월 8일, 그 장벽 앞에 앉아 바흐의 무반주 조곡 (Cello suite No. 1 i-prelude)를 연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했던 그는 1991년 보리스 옐친이 대통령 당선 직후 쿠데타에 의해 위험에 처하자 비자도 없이 크렘린 광장으로 달려갔으며,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열적인 연주만큼 뜨거운 인류애와 조국애를 가졌던 그와 그의 아내는 1991년 RVF를 설립하고, 상대적으로 소아 보건이 열악했던 러시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의 구소련 국가의 어린아이들의 공중보건과 예방접종을 위한 일을 시작한다.
Dr.R의 발표는 구소련 국가의 연구가 아닌, 2010년 새로 시작된 중앙아시아의 분쟁지역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서안지구(west bank) 지역에의 소아 백신 접종 프로젝트에 대한 RVF의 활동을 발표하였다. 세계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지역의 소아 건강을 위해 앞장선 RVF의 활동을 보며, RVF의 설립자인 로스트로포비치와 똑 닮았음을 알 수 있었다. RVF 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백신 접종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미국 국제개발처(USAID), Emirate Red Crescent, Arab fund로부터 자금을 모아, 백신을 저가에 구입할 수 있도록 내고하고, UNICEF와 백신 조달에 관여하며, 현지에서 이루어진 백신 프로그램의 평가 등을 맡고 있다.
공중보건은 정치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계는 언제, 어디서든지 위험한 전염병에 노출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토착 전염병인 에볼라와 중동의 메르스가 대륙과 바다를 건너 퍼져가고 전 세계인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것은, 더 이상 남의 나라 보건 문제가 남의 나라만의 문제가 아님을 잘 설명하는 예이다. 그래서, 많은 비영리 단체들이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국가의 공중보건을 위해서 나서고 있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고 위험한 지역, 팔레스타인으로 RVF 가 나서고 있다.
인류를 사랑했던 위대한 음악가 ‘로스트로포비치’의 삶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