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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과학자 Aug 17. 2019

‘마마 위니’ ‘마마 웨투’-위니 마디켈라 만델라

만델라의 아내를 넘어선 남아공 반 아파르트 헤이트 운동가


학회 마지막 날 호텔 탈출을 시켜주었던 가이드가 ‘땡큐 만델라’와 함께 자주 쓰는 말이 있었으니, ‘마마 위니’였다. 만델라의 두 번째 부인이자,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이혼 후여서 영부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공 사람들에게 ‘마마 위니’라 불릴 만큼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 그는 ‘위니 마디 켈라 만델라 (Winnie Madikizela Mandela) ’이다. 

출처: South Africa History site

위니는 1936년 남아공 트란스케이에서 역사 교사인 아버지와 과학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남자아이처럼 자라길 원했고 그는 주로 남자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칼싸움을 하는 등 ‘Tomboy’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그가 9살이 되던 해인 1945년 그는 남아공에서 인종차별과 그에 대한 제도적인 문제와 불의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다. 2 차 세계 대전이 종식을 축하하는 자리에 초대받은 그의 가족은 행사장 앞에서 ‘백인만을 위한 파티’라며 입장을 거부당했고, 눈 앞에서 벌어진 명백한 불의가 어린 소녀였던 위니가 남아공 사회 및 주변 사회의 불평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50년 대 흑인과 백인을 분리 교육하는 반투 교육이 시작되기 전 교육을 받았던 위니는 감리교 계열 학교인 Shawbury에서 수학하고 탁월한 리더십을 가지고, 아프리카계 흑인의 고등교육의 핵심이었던 포르 하레 대학 졸업생인 선생님들의 지도하에 정치적으로 눈을 뜨게 된다. 1953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던 그는 이미 국가적 명성을 얻었던 정치가 ‘넬슨 만델라’의 후원자 중 한 명이었으며, 요하네스버그에서 매일매일 [아파르트 헤이트]를 경험하고 목격했다. 1955년 사회복지 학위를 받은 그는 요하네스버그의 Barawanath 병원에 흑인 최초로 의료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그는 흑인들의 거주지였던 알렉산드리아 타운십의 영아 사망률에 대한 연구를 했다. 1000명 당 10명의 영아가 사망하는 알렉산드리아 타운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곤과 시스템의 불평등 속에서 살아가도록 강요된 당시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위니가 더 크게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만델라를 만나기 전, 그는 충분히 정치적이었으며 충분히 저항을 위한 준비가 되어있었다. 

넬슨 만델라와 위니 만델라 (출처: South Africa History site)

1957년 넬슨 만델라와 위니는 약혼을 한다. 위니는 22살로 넬슨과는 16세 차이가 났으며, 그 당시 이미 만델라는 반역 재판 (Treson Trial)의 150명의 피고인 중 한 사람이었다. 1958년 정부의 감시하에 있던 넬슨은 허가를 받고 위니의 고향에서 결혼을 한다. 한 나라의 가장 정치적인 사람, 아파르트 헤이트 저항 운동의 거장인 넬슨과의 결혼은 그야말로 스펙터클한 삶의 연속이었다. 1958년 10월 위니는 아파르트 헤이트 법안에 항의하기 위해 여성들을 동원하는 집회에 참여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 여성 리그의 회장이 릴리안 응아가, 알베르티나 시술루가 주최한 이 집회에서 위니는 알베르티나와 함께 도심으로 행진했으며, 이 행진 집회에서 경찰은 1,000명의 여성을 체포했다. 체포된 여성들은 즉시 보석금을 신청하지 않고 체포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2주 동안 감옥 생활을 자처한다. 이 당시 위니는 임신한 몸으로 남아공 감옥의 참혹함을 직접 보았고 투쟁에 대한 의지와 헌신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1961년 반역 재판에서 넬슨은 혐의 없음이 인정되었지만, 넬슨의 투쟁과 그 지하 조직을 소탕하고자 하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 숨어 지내여야만 했다. 위니는 남편을 만나러 갈 때에 눈 가리개를 하고 어둠 속에서 남편을 만난 적도 있었다고 회상했었다. 넬슨의 Black Pimpernel의 시기가 그때였으며, 위니는 비밀스럽고 짧은 만남에 적응해야만 했었다. 1961년 8월 5일 더반에서 요하네스버그로 이동하던 넬슨이 경찰에 의해서 체포되었고 넬슨의 27년간의 구금 생활이 시작됨과 동시에 위니의 정치적 미망인의 삶이 시작되었다. 1963년 로벤섬으로 옮겨긴 넬슨을 보기 위해 위니는 1,400Km를 여행했고 단 30분 동안 영어 혹은 아프리칸스 어로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 면회는 넬슨이 구금된 후 처음 있는 면회였다. 27년 동안 정부는 그 부부에게 1년에 2번 150 단어 이하의 편지와 30분의 면회만 허락하였다. 


아파르트 헤이트 반대 투쟁의 중심에 던져진 위니는 행동하기 시작했고, 정부는 그를 감시하고 처벌했다. 가택 연금을 당하고, 경찰에 의해 고문을 당하고, 두 딸과 분리되어 491일을 독방에서 지냈으며, 나중에는 다른 언어를 쓰는 시골 마을로 추방되었다. 그의 이러한 투쟁의 삶은 넬슨이 감옥에 있는 27년간 넬슨의 이름과 그의 업적을 사회와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넬슨은 위니에게 자녀들과 망명하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투쟁할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에게 투쟁은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체포당하고, 남편 없이 생계를 꾸려하는 여성으로서 ‘진통제(오피오이드)’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심지어 추방당한 오지 마을에서도 그는 지역의 원예 단체를 설립하고, 아동복지 시설, 고아와 청소년 연합단체 및 바느질 클럽 등을 결성해 활동을 이어갔다.

추방당했던 마을에서

1986년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요하네스버그는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폭동과 위험에 처해있는 소웨토 지역의 청소년들을 위해 ‘만델라 유나이티드 풋볼 클럽 (MUFC)’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풀뿌리 정치활동을 통해 학계를 통해 정치가가 된 감옥의 넬슨과는 반대로 위니는 육체적으로 징역과 추방이 반복되고 감정적으로 가족이 갈라지고 동지들의 배신을 경험함으로 인해 ‘지상의 군인’의 길을 걷는다. 실제 이 당시에 위니는 군복을 연상시키는 카키색 슬랙스를 입고 대중 앞에 등장했다. 그가 많은 청중들 앞에서 “함께 손을 잡고 성냥갑과 목걸이를 가지고 이 나라를 해방시킬 것이다”라고 한 연설은 죽음의 목걸이라고도 불리는 속결 처형 방법 ‘넥 레이싱(necklacing)’ 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여 논란의 중심이 되기도 했었다. 그가 창립하고 그 멤버들을 보디 가드로 사용했던 MUFT의 몇몇 회원은 고문, 강간 및 살인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을 받고, 14세의 제임스 세이피를 스파이로 의심해 폭행,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이 일은 위니가 직접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1991년 유죄판결을 받는다.

지상의 군인이 된 위니


1990년 만델라의 석방 장면에는 함께 손을 잡고 환호에 응하는 위니가 있다. 지상의 군인에서 넬슨의 아내로 돌아가는 시점이었음과 동시에 그의 명성이 한 단계 더 올라가는 시기였다. 그러나, 27년을 완전히 다른 정치적 노선을 걸었던 그들의 결혼생활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1992년 넬슨은 이혼을 발표하고, 1996년 27년의 옥살이가 포함된 38년의 결혼생활을 마감한다. 넬슨은 위니가 그가 깨어있는 동안 한 번도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혼 절차 중에 밝혔다. 이혼 이후에도 위니는 ‘만델라’라는 성을 유지했으며 1994년 예술, 문화, 과학 및 기술 부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여성리그의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횡령 및 사기에 대한 의혹을 받고 기소를 당하며 관직에서 해임당한다. 2007년 아프리카 민족회의 전국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반이민 폭력 문제에 앞장서며, 2011년에는 그의 투쟁의 역사와 노력을 인정받아 남아공의 평화상이라 불리는 “우분투상”을 수상했다.

넬슨 만델라 석당 당시

2018년 위니가 사망했을 때 언론에서는 그를 ‘평가가 엇갈리는..’ 혹은 ‘추악한 말년을 보낸..’ 등등의 부고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지금도 남아공에서는 그는 “마마 위니”라고 부르며 넬슨의 대통령 재임 시 영부인인 ‘그라사 마셸’ 보다 ‘국모’로 여기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위니는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자신을 한 마디로 설명해 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결코 나 자신을 개인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나는 남아공 해방 운동의 일부일 뿐이다. 나는 결코 개인인 적이 없었으며, 공동체 밖에서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 

그는 가장 유명한 정치인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넬슨과는 대조적으로 정치적으로 폭로당하는 대가를 치렀다. 수 십 년간 정부에 의한 육체적, 정신적 잔인함 속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제대로 경험할 기회가 없었으며, 임신을 금지당했고, 가정의 생계를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했다. 그가 넬슨과 결혼할 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만약 너의 남자가 마법사이면, 너는 반드시 마녀가 될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예언이 맞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위니는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했고, 소리 없는 이들을 위한 목소리가 되어줬으며, 착취에 맞서 정의와 평등을 수호했다”는 추도 성명을 냈다.
 
 

남아공 소웨토의 아주 작은 ‘만델라 하우스’ 뒷 뜰에는 한 손을 주먹 쥐고 투쟁하는 듯한 위니의 비석이 하나 있다. 

“나는 이 나라 대중과 내 적들의 작품이다 “라는 말은 남아공 아파르트 헤이트 투쟁의 역사의 한 획을 그었으며, ‘마마 위니’를 넘어 ‘마마 웨투 (Mama Wetu, 국가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유를 담고 있다. 

https://www.sahistory.org.za/people/winnie-madikizela-mandela
 
https://www.dw.com/en/who-was-winnie-mandela-south-africas-mother-of-the-nation/a-43227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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