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통성이 없는 어떤 사람이 최근에 나에게 물었다.
"당신이 진짜 원하시는 게 뭐에요?"
그 말을 듣고 울음이 나올 뻔했다. 어린 내면 아이가 또 튀어나왔다. 쩔쩔매는 모습,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도저히 몰라 저 질문에 큰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만 유년기 15년을 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도 모르는 아이, 그리고 성인이 돼 있었다. 이 내면 아이는 마흔이 넘어서도 나를 계속 따라다닌다. 아마 평생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그림자가 될 수도 있겠지.
성인이 되서도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모를 때가 많다. 최근 마지막 상담, 올해 3월에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걸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에 대한 이슈가 나왔었다. 그 때 상담 선생님은 더 깊이 파고들어가길 원했으나 나는 그마저 피했다. 머리가 아팠다. 더 이상 과거로 회귀하고 싶지 않았다.
네 아이 각자의 엄마가 처음이다 보니 이 아이에게는 무엇이 맞을지, 또 다른 아이에게는 어떤 방법이 더 나을지 수없이 고민한다.
영재고에 가고 싶다는 첫째 아이, 아무리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최상의 환경이더라도 그런 경쟁의 세계에 이른 나이부터 아이를 넣는 게 맞는 건지.
평발 때문에 재활 치료를 하고 있는 둘째 아이, 일 주일에 두 번씩 세 시간 이상 왕복 소요되며 시내까지 다니는데 이게 잘 하는 건지. 차도 막히는 시간에 다른 세 명의 아이들을 희생시키며 이 치료를 꼭 받아야 하는 건지. 그래도 이게 최선이겠지 싶어 또 나서는 병원행.
열정적인 만큼 자기 주장도 무척 강한 셋째 아이, 나와 너무 비슷해서 자꾸 충돌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런 아이일수록 더욱 더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게 아닌지. 하지만 현실에서는 버럭.
유치원을 가기를 거부하는 넷째 아이, 내가 누울 자리를 줘서 자꾸 발을 뻗는 건 아닌지. 아이가 원하면 자꾸 집에 데리고 있으니 더 가기 싫어하는 건 아닌지. 며칠 데리고 있으면 나도 체력적으로 지쳐버리는데 더 완고하게 보내야 하는 게 아닌지.
완전히 각각 새로운 인격체들 앞에서 때론 꽉 막혀버린다. 마치 벽이 앞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왜 늘 벽에 부딪히지?
<허튼 생각>, 브리타 테켄트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