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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Feb 12. 2022

꿀꺽 삼킨 말의 흔적

좀 무서워서 글을 다시 쓴다.

벌써 8년이나 되었나?

의사에게 6년 전이라고 말하고 나서 초음파 검사를 받으려고 누워서 헤아려 보니 벌써 8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동네에 잘 가는 의원이 있었다. 의사 선생님도 친절하시고, 집에서 걸어서 몇 분 안 되는 거리도 마음에 들어서 내 마음대로 그 의사 선생님을 나의 주치의로 삼겠다고 결정해 버렸다. 나만 알고 있는 나의 주치의 선생님은 좀 재미있는 분이었다. 살면서 '암'인 것 같다고 나에게 말해준 유일한 사람, 그것도 두 번이나 그 말을 했던 사람이다.


처음 나에게 암인 것 같다고 했던 부위는 담낭이었다. 자신의 진단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는지 내 몸통 전체를 초음파로 샅샅이 살펴본 후 오진이라고 순순히 말해주며 미안했는지 병원비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덕분에 난생처음 내 몸 구석구석을 초음파를 통해 구경하는 진귀한 경험을 한 나는 그분이 그렇게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호의를 냉큼 받았다. 그걸 거절하기엔 초음파 검사비가 부담스러웠으니까.

그렇게 첫 번째 암 진단은 진귀한 경험과 훈훈한 호의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번에 그 의사 선생님이 암인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곳은 갑상선이었다. 이번에는 첫 번째와는 달리 내분비내과 전문의를 소개해주셨다. 소개받은 병원에 소견서를 가지고 가서 이것저것 검사를 받았다. 피도 뽑고, 엑스 레도 찍고, 초음파 검사까지 마친 후 조직검사를 해보자며 엄청나게 긴 바늘을 목에 찔러 넣는데 정말 이 검사는 너무 끔찍했다. 사실 바늘이 들어가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끔찍한 건 비주얼이었을 뿐. 내 목 안으로 저렇게 긴 바늘이 쑥 들어가서 곳곳을 후비고 다닌다는 게 너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그 시각적 느낌이 몸에서 촉감으로 되살아났다.

검사 결과는 갑상선 결절이었다. 나의 주치의 선생님 진단이 이번에는 맞았다. 종양은 종양인데 다행히 악성이 아닌 양성이었다. 안심하고 느긋하게 검사 결과를 들었었지만 초음파 사진으로 보는 내 목은 기묘했다. 흔히 물혹이라고 말하는 결절이 포도송이처럼 갑상선 주변에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은 거야?

그동안 내가 삼킨 말들이 목구멍에 저렇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던 건가?


그때 내가 그랬다. 속에서 나오는 말을 쉽게 뱉어내지 못했다. 매번 그 말들을 삼켰다. 누군가 상처받을 까 봐,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는 내 모습을 말이 흠집 낼까 봐 겁이 나서 수많은 말들을 삼켜버렸다. 그땐 몰랐다. 말을 삼키면 음식이 그렇듯 소화되어 사라져 버릴 줄 알았지, 내 몸 어딘가에 이렇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갑상선에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혹들이 내가 삼킨 말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그런 것이지.


모양이 이상한 물혹 덕분에(?) 그 후로 6개월마다 한 번씩 추적 검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 강릉으로 이사를 하면서 2년 넘도록 갑상선을 잊고 살았다. 처음 갑상선에 매달린 혹을 목격한 후로 말 삼키기를 그만 두기로 결심했었다. 그것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나 검사 결과가 점점 좋아졌다. 검사를 받을 때마다 물혹이 하나둘 사라져 있었다. 이젠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되겠다고 내 마음대로 결정을 내려 버렸다.


갑상선에 매달린 혹의 존재가 다시 떠오른 건 어떤 책 때문이었다. 미셀 렌트 허슈의 책, <젊고 아픈 여자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내 목으로 손이 갔다.

'검사를 받아볼까?'

제법 덩어리가 만져지는 목을 손으로 만지며 다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진찰실에서 다시 초음파 사진 속 내 목을 보았다. 이제는 포도송이처럼 물혹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지는 않았지만, 몇 개가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모양이 이상한 혹은 여전히 기분 나쁘게 이상한 모양이었다. 어김없이 내 목을 처음 본 의사는 조직검사를 다시 받아보자고 말한다.


겁이 나서 말을 삼키는 걸 그만두고 8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8년, 이 시간은 정확하긴 한 걸까? 어느 순간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를 계산하는 게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기억이 서로 엉키고 뭉쳐서 그걸 풀어내서 기다랗게 펼쳐놓는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은 그 시간이 8년 정도인 것 같으니 그냥 8년이라고 하자. 말을 삼키던 버릇이 생각처럼 순순히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못했나 보다. 여전히 어떤 말은 꿀꺽 삼켜서 혹의 부피를 늘리고 있었나 보다. 어쩌면 모든 말을 뱉어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삼켜야 하는 말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말을 삼키고서도 아니라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니.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삼킨 말들, 선의로 삼킨 말들을 똥으로 변신시키는 법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똥이 되어야 몸 밖으로 나올 테니. 삼킨 말을 똥으로 바꾸려면, '소화'라는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삼킨 말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감정들, 그걸 좀 떼어내면 목에 걸리지 않고 위로 내려갈 수 있을까? 삼켜서 억울한 감정, 말이 되어 나가지 못해서 속상한 마음, 답답함, 무력감, 분노, 자괴감, 수치심, 죄책감, 이런 감정들을 삼킨 말에서 분리해내면 될까?


방임, 이건 내가 삼킨 말들에 대한 나의 태도.

방임하지 않으려고 오늘은 이렇게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삼킨 말들을 다시 글로 뱉어내기 위해. 그 말이 위로 쑥 내려가서 소화가 될 수 있게 삼킨 말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감정들을 떼어내 백지 위에 펼쳐 본다.


3일 후 혈액검사 결과까지 나오면 8년 만에 다시 조직 검사를 받아야 할지, 이대로 그냥 넘어가도 될지 연락이 올 것이다. 지금 좀 겁난다. 겁나서 오랫동안 외면했던 글쓰기를 이렇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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