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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Feb 17. 2022

어떻게 살길래 '5'죠?

갑상선 결절 상태를 확인하러 간 병원에서 뽑은 내 피가 알려주는 수치들, 그 숫자들은 모두 정상 범주 안에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딱 하나만 빼고!

'5'라는 숫자가 의사의 입에서 나왔다.


"비타민 D 수치가 5에요. 도대체 뭐 하는 분이세요?"

귀가 의심스러웠다. 잘못 들었겠지. 어떻게 비타민 D 수치가 5가 나올 수가 있겠어?

(이 수치의 정상 범위는 10-30이다.)


그가 자랑스럽게 그리고 눈치 없이 의사에게 말했다.

"대학에서 강의해요."


난감했다. 그의 말에 따라올 의사의 질문이 뻔해서.

"어떤 것 강의하세요?"


비타민 D 수치가 5가 나온 사람이 간호학과에서 전공 강의를 한다고 말하면 이 의사는 뭐라고 생각할까? 눈치 없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사람의 몸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자기 몸을 항상 잘 관리하라는 법은 없지만, 살면서 '다른 사람도 아닌 그걸 배운 사람이, 간호사가 아파요?'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속에는 매번 걱정보다는 추궁이 듬뿍 섞여 있었다. 간호사가 아프면 직무 태만이고, 간호사로서의 능력을 의심받기도 했다. 병원에서도, 보건교사로 근무하던 학교에서도. 그리 튼튼하지 않은 체력의 소유자여서 그 시절 내 기억에는 눈칫밥 먹던 서러운 감정이 여기저기 묻어있다.


"간호학과에서 강의해요. 전공과목이요."

이 말을 하기 싫은 나는, 실은 나를 책망하고 있었다. 잘 아는 사람이 이런 수치가 나오도록 뭘 한 거야? 누가 딱히 뭐라는 것도 아닌데 그냥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과거의 기억이 서러운 것도 그들의 눈치에 나의 자책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나 보다.


진료실을 나와서 턱없이 부족한 비타민 D를 보충하기 위한 주사를 맞고 검사지를 달라고 했다. 눈으로 직접 그 수치를 확인하지 않고는 5라는 숫자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검사지에 인쇄된 숫자도 의사의 말과 일치했다.

'5!'


그러고 보니 팬데믹이 시작되고서 집 밖에 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마당이 있는 집이건만 마당조차 별로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5'지.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5라는 숫자는 끝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끌고 내려갔다. 한편으로는 5라는 숫자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혈중 칼슘 수치와 다른 검사 결과들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칼슘 네 덕분에 그래도 내가 아직 골다공증은 아니구나. 고마워!

비타민 D 수치가 5가 나올 정도로 집에 콕 박혀있었는데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이렇게 멀쩡하다니, 간수치가 이렇게 괜찮다니, 고맙다 간아!

검사지 하나가 뭐 이렇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 이런 생각 속에서 반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코로나, 이건 코로나 탓일까?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가 일상의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고 하니, 이것도 코로나 때문인가 슬쩍 책임을 전가해보려는 시도. 하지만 코로나 핑계를 대는 건 좀 뻔뻔한 것 같다. 코로나 때문에 힘들다는 말을 들으면 나도 그런 척했지만 사실 난 팬데믹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다. 밖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나를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되니 묘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강의도 모두 온라인으로 하게 되고, 많은 일들이 다양한 온라인 네트워크 프로그램을 통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어가는 게 내심 좋았다. 그 결과가 '5'라는 숫자로 내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팬데믹이 나의 일상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땅을 밟아본지 너무 오래되었다. 몸을 움직이고, 몸으로 세상을 접촉하고 느끼고 만나는 일이 드물어졌다. 팬데믹이 너무나 좋은 핑계가 되어주어서 이 몸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존재라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모든 게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니 그 세상이 내 몸인 양 착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몸이 너무나 무겁다. 기운 없이 축 쳐진 몸이 너무 우울해 보인다.


"나를 저 햇살이 비추는 곳으로 내보내 줘. 삶의 감각을 다시 느끼게 해 줘."


월세가 밀린 세입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도대체 그동안 밀린 월세가 얼마인 거야?


이대로 있다간 조만간 뼛속의 칼슘도 버티지 못하고 정상 범위를 벗어날 것이다. 다른 숫자들도 또한 그렇겠지. 집 밖에 나가기 싫어 집 안에 이것저것 운동기구도 들여놓았지만, 5라는 숫자는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나가야지. LED 조명이 밝은 방 말고 햇살이 비추는 곳으로. 일단, 마당에서 할 일을 만들어야겠다. 곧 봄이 올 테니 지난 폭설에 꺾여버린 라벤더라도 정리를 해야겠다. 주인집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서 얼른 월세를 내야겠다. 햇볕이라는 월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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