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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Sep 23. 2021

아일랜드 제사상

월간문학 수필 신인작품상 / 2020년 9월호 월간문학

아일랜드 제사상

 

아버님은 남편이 중3 때 돌아가셨다. 이제 남편은 당시의 아버님보다 더 나이가 많아져 아버님 영정사진을 보면 남편의 막내 동생으로 보일 지경이다. 남편과 결혼하던 해 가을, 아버님 기제사를 지냈다. 추석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어머님은, 귀신은 마늘을 못 먹는다면서 제사상에 올릴 도라지 볶음이나 고사리나물에 마늘을 넣지 않았고, 파도 마늘과라서 넣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대신에 음식이 너무 심심하니 끝단이라도 조금 넣어야겠다며 파란색 쪽파의 끝부분을 쫑쫑 썰어 음식 위에 뿌리셨다. 귀신은 비늘 없는 생선은 못 먹으니 고등어나 오징어 같은 건 올리지 말고, 수염 난 것도 안 되니까 복숭아나 키위 같은 과일도 피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장을 보고 다듬고 상을 차리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는데 이틀 내내 메뉴얼을 읊듯이 설명을 곁들이셨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님께서 우리 집으로 보따리 한 꾸러미를 가져 오셨다. 이제부터 제사와 차례는 맏며느리에게 맡기신다며 아버님 영정사진과 촛대, 향 등을 모두 가져 오신 것이다. 어머님이 내내 설명을 하셔도 내 일이 되리라는 생각은 미처 못한 터라 보따리를 받아 든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아일랜드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큰 어머님께서 귀신은 물 건너 못 간다면서 동서되는 어머님께 호통을 치셨다. 이제 막 결혼한 새 며느리에게 제사를 넘긴 동서가 못 마땅해도 별 말 안했는데, 이제 어딘지도 모르는 바다 건너 유럽 어디를 간다는 애한테 서방님 제사를 맡길 참이냐며 성을 내셨다. 어머님께서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제사는 두고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단 한번, 어머님께서 구정 차례를 지낸 후 제사는 다시 내게로 왔다. 아들도 없이 제사 지내는 사람은 세상에 당신 하나라며 용암 폭발하듯 분노와 설음을 전화 너머로 쏟아 내시는데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귀신이 바다를 건널 수 있건 없건, 비행기를 탈 수 있건 없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평화를 원했다. 그때부터 나의 창조적 제사상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도저히 상을 차릴 엄두도 나질 않고 제사음식 재료를 구할 방도도 없어서 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걸로 대신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아일랜드 생활에 익숙해지고 누가 검사하는 것도 아니니 한번 차려 보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 식구가 먹을 음식인데, 영국이나 아일랜드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를 이용해서 남편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차리면 되겠다는 배짱이 생긴 것이다. 

  그 후, 아버님께서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종종 하셨다. 남편이 아일랜드에 있을 때는 아일랜드에서 제사를 모시고, 영국에 있을 땐 영정사진을 모시고 가서 영국에서 제사를 모셨다. 우리 형편 되는대로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향이 다 떨어지면 이곳 사람들이 쓰는 방향제로 대신했다, 때로는 타이 향으로, 때로는 인도 향으로. 아일랜드에는 조기가 없어 씨바스(농어)를 올린다. 나름대로 조기 못지않은 외모와 조건 갖춘 생선이다. 비린내 없는 흰살 생선으로 바다를 누비며 몸을 보호하던 비늘도 단단히 달려 있다. 가끔 머리까지 온전히 달려 있는 것을 구하기 힘들 땐 그냥 중간 토막만 구워 올리기도 한다. 도라지와 고사리를 구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늘 세 가지 나물은 빠트리지 않았다. 시금치는 뿌리도 없이 끝자락만 있는 샐러드용 포장을 다섯 봉지는 사야해서 고기 값보다 더 든다. 거기에 숙주나물과 가지나물을 올리면 삼색나물이 된다. 때로는 무나물이나 양배추 나물을 하기도 한다. 

  가을이면 탐스럽고 때깔 좋은 과일이 수두룩한 한국과 달리 아일랜드에서는 큼직한 사과, 배를 구할 수가 없다. 그나마 가장 색깔도 예쁘고 크기도 주먹 정도 되는 핑크레이디 사과를 선택한다. 한국의 홍옥에 가깝다. 사과, 바나나, 멜론, 포도, 파인애플 등 그날 가장 예쁘게 생긴 애들로 골라서 상에 올린다. 마른 대추가 없으니 빵 만들 때 주로 쓰는 설탕에 절인 데이츠로 대신했다. 데이츠는 대부분 중동의 무슬림이 만든 것인데, 제사상에 올라가는 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 싶어 웃음이 나기도 한다. 

  상을 차릴 때 주부들이 가장 힘들고 시간을 많이 쓰는 게 전이다. 전은 그래도 재료가 많다. 맛살과 소시지 피망 등을 잘라 적을 만들기도 하고, 호박전이나 고구마전, 두부전을 돌아가면서 만든다. 때때로 서양 야채를 올리기도 한다. 베이컨에 말아서 아스파라거스를 올리거나 브로콜리 전을 부치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나는 점점 더 대범해지고 제사상 차리는 재미도 더해졌다. 쌉쌀한 향이 나는 로켓 샐러드를 시금치 대신 데쳐 무치기도 하고 은행을 닮은 피스타치오 넛츠를 담아 놓기도 한다. 

  제사상의 메인 메뉴는 스테이크이다. 제사상에 올리는 쇠고기는 립아이 스테이크로 하는데 처음엔 얇게 저며서 요리를 하다가 맛이 없어서 몇 년 전 부터는 그냥 스테이크로 큼직하게 구워 올린다. 그러다 보니 우리 제사상에는 숟가락, 젓가락 외에 포크와 나이프도 등장하게 되었다. 스테이크는 먹을 때 바로 썰어 먹어야 제 맛이니 미리 썰어 놓을 수가 없어서다. 더구나 우리 가족은 모두 푹 익은 스테이크를 싫어해, 핏물이 살짝 흐르는 미디엄으로 굽는다. 접시에 핏물이 살짝 비칠 때면 나는 단 한 번도 뵙지 못한 아버님께 말을 건넨다. 

 “바다도 건너시고, 비행기도 타시는데 이 정도 서양식은 드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아버님 괜찮죠?” 

  생선전은 동태가 없어서 생 대구로 한다. 그런데 사실 맛있는 생선을 자잘하게 썰어서 밀가루를 묻혀 부치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나는 생 대구를 영국식으로 통째로 굽는다. 그러자 요리시간도 줄고 음식도 훨씬 맛있다. 그 옆에는 항상 감자전이 곁들여진다. 영국의 대표 음식인 피쉬 앤 칩스와 비슷하다. 모든 메뉴는 내 마음대로 결정되지만 단 한 가지, 술만은 남편이 선택한다. 정종 대신 화이트 와인으로 한다. 유럽에 살다보니 가격도 비싸지 않고 종류도 다양한 와인을 자주 마신다. 평소에는 슈퍼마켓에서 그날 할인해서 판매하는 와인을 주로 사지만, 제사가 있는 날은 평소 마셔보고 싶었던 고급 와인으로 신중하게 고른다. 남편도 아버님 핑계로 이 날은 고급술을 마실 수 있어서 내심 설레는 것 같다. 

  이제 제수준비는 나에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평소에 먹고 싶었던 한식을 해 먹는 날이고, 남편은 그리운 아버지를 집중해서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외국 사는 며느리에게 해마다 조금씩 다른 메뉴로 차려지는 상을 받는 아버님은 어떠시려나? 아버님은 살아생전 신식 음악을 좋아하시고 그림 그리기와 패션에도 관심이 많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님과 종종 마찰이 있었다고. 예술가 기질이 많으셨던 분이니 어쩌면 남다른 제사상을 즐기실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제사가 우리에게 즐거운 행사가 되었듯이. (1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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