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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May 11. 2021

오늘은 다른 이야기 - 코시국 코찔린 날

코로나 밀접접촉자로 검사 받고 음성 판정까지 받은 날

 평소와 다름 없는 출근길. 회사 친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 아침부터 왜지? 우리집에서 뭐 가져다 달라고 할 게 있나?


 “여보세요?”

 “응. 어디야?”

 “나? 출근 길이지? 왜?”


 아무것도 예측하지 못했던 순간. 평화롭게 마을 버스의 시계를 쳐다보던 그, 고요한 느낌이 한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 코로나 양성 판정 받았어. 너도 지금 가까운 진료소 가서 검사 받아봐.”


 장난이지?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순간. 마을버스에서 내려 건너편에서 경기버스를 타고 출근해야 하는데 차마 신호등을 건너지 못하고 내 발걸음은 그대로 멈추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 오늘 아침에 우리 엄마랑 마주앉아 아침밥 먹었는데? 그리고 나 어제 이 친구랑 점심 먹은 뒤 누구를 만났지? 마스크를 벗었던 순간이 있었나? 진료소는 어디에 있는 거지? 어떻게 받는 거고 언제부터 열지? 너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와 머릿속 누구의 질문부터 대답해줘야 할지, 발걸음과 함께 생각도 멈춰버렸다.

 가장 먼저 했던 통화는 역시나 아빠.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신기하게 엄마보다 먼저 생각나는 건 아빠다. 미주알 고주알 모든 걸 얘기하고 항상 친하게 지내는 건 엄마인데 왜 이런 순간마다 아빠가 먼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아빠는 역시나 큰 힘이 되는 조언을 해주었다. 지금 집에 돌아가서 엄마를 마주치는 일은 없도록 하고 어제 함께 저녁 먹은 회사 사람에게 바로 전화해서 회사에 코로나19가 더 퍼지는 일은 없도록 사전에 막을 것. 바로 아빠의 말을 시행에 옮기며 집에 들르지 않고 가장 가까운 진료소로 향했다 - 어제 야근하며 함께 김밥을 먹은 회사 사람에게 어서 집으로 돌아가란 통화를 잊지 않으며.


 뭐, 언제든지 야무지게 해낸 적은 없으니까..ㅎ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과 함께, 난 코로나 검진에 돈을 냈다. 무료로 검사해주는 보건소도 있던데 역시 내가 그렇지 뭐~ 내가 간 곳은 돈을 받는 유료 병원이었다. 하지만 그 황망한 마음을 가지고 무료 보건소를 다시 찾아갈 순 없을 터. 그냥 2만원 돈 내고 (2만원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냥 여기서도 야무지지 못한 내가 웃겼을 뿐) 유료 검진에 대기를 넣었다. 엄청 초스피드더라. 다른 무료 보건소를 안 가봐서 보통 어떤 속도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다림이 채 10분도 되지 않아 내 순서가 되었고 무슨 스티커를 한장 받은 뒤 (그 스티커의 용도를 아직도 모른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라면서요..) 뒤편으로 돌아가니, 투명 유리창 건너 한 아주머니가 팔목이 간신히 들어갈 2개의 구멍 사이로 양손을 내밀고 나한테 가까이 오란다.


 “두 번 찌를 거에요. 입이랑 코.”


 입 정도는 뭐 1초 컷. 금방 했다. 근데 코.. 코 찔림에 대해서는 너무 안 좋은 소문(?)을 많이 들었다. 뇌까지 찔리는 느낌이라나(이 과장 퍼뜨린 사람은 내가 찾는다), 끔찍하다나. 어머니가 내 코 앞으로 주사기를 가져오는 족족 뒷걸음질 치게 됐다.


 “많이 아파요오오? 힝 많이 아픈가요?”


 어머니의..한심해 하는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유리창 너머로, 아침 9시부터 지친 듯한 그녀의 표정. 근데 그 지친 와중에 대꾸하기 어려운 이 초딩스러운 아이는 뭐지.. 라는 느낌. 그래. 난 올해부터 삼십대인데 어머니에게 코로나19 검진 주사기가 아프냐고 물으며 징징대고 있던 것이다. 살짝 현타가 왔지만 몸의 작용 반작용 (이때 쓰는 게 맞던가) 현상을 멈출 수 없었다. 어머니 팔이 다가와 코를 찌르면 뒷걸음질치기를 딱 3번 (적다고 볼 수 없다. 어머니의 프로페셔널함과 지친 표정을 감안하면, 모든 걸 원샷에 끝냈어야 상도덕에 맞는다)

 그렇게 어머니에게 안 좋은 기억을 남기고 진료소를 유유이 빠져나왔다. 사실... 다시 대기장소로 돌아가려다가 그쪽이 아니고 밖으로 나가라는 핀잔을 살짝 들었다. 이 모든 것은, 코로나19 로 인해 고생하시는 모든 의료진 앞에서, 그들의 소중한 시간과 컨디션을 깎아먹은 내 탓이 너무 크다.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께 사과 드리고 싶다.


 아침 8시 반부터 10시까지의 소동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회사의 팀장님께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필요한 분들께도 연락을 드렸다. 어제 나와 함께 출근해있던 팀원들 6명이 모두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미안했다. 그 중엔 엄마인 분들도 있었고 아직 어린 인턴도 있었다. 만약 오늘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집에 돌아가기 망설여질 사람들. 코로나가 이렇게 내 주위에 가까이 있었나?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 정도로 무서운 거였는데 그동안 코로나 코로나 말로만 익숙해져있었구나.

 제일 걱정되었던  아무래도 나와 함께 아침밥을 먹은 엄마. 내가 집에 있는 내내 마스크를 벗지 않으신다. 심지어 음성 판정을 받은  6시간이 지난, 지금 오후 9시까지도. 엄마 아빠 나이엔 당연히 조심하는  맞으니까. 나는 밀접접촉자라서 오늘 당장 음성 판정을 받았어도 앞으로 14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말은, 오늘  음성 판정이 100% 신뢰할 만한 결과가 아니란 거다. 정확히 13 뒤에 한번  검사를 받아야 하고 그때도 음성  나온다면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된다.

 그래도 아침의 어리버리한 상태의 나에게 감사한 점은, 유료 진료소에 갔던 것. 나랑 비슷한 시간에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간 밀접접촉자분들과 비교했을 때 월등히 빠르게 검사 결과를 받았다. 나를 제외하곤 5명 정도 모두 결과를 받지 못한 상태인데 나만 오늘 오후 3시에 결과를 받았다. 음성 결과를 받은 사진을 첨부한다.

  세상에 이렇게 반가운 문자가 있을까. 물론,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진짜 설마 걸리겠어?’하는 마음이 없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혹시 모르지.’라는 마음이 들면 그 순간이 참.. 아찔했다.


 내가 밀접접촉한, 어제 나와 점심을 같이 먹은  친구는 지금 용인 격리센터에  있다. 어디서 걸린지 모를 감염이고 의도치 않게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과 피해를 주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플 것이다.  쾌차했으면 좋겠고  친구가 계획한 5월의 중요한 일들에 아무런 차질이 없기를 바란다.

 내가 오늘 이 글을 남기고 싶은 건 2가지 이유다. 첫째, 이 시대에만 기록할 만한, 참 특이한 (미래엔 절대 없었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담겨있다) 사건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중엔 ‘그땐 그랬지. 이게 진짜 말도 안되는 일이야. 코로나라는 게.’ 라고 생각하면서 이 시간을 떠올릴 날이 왔으면 좋겠다. 둘째,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나비의 날갯짓 같은 순간이 얼마나 많은 걸 바꿀 수 있는지 기록해두고 싶었다. 양성이 되고 음성이 되고, 밀접접촉자가 되고 동선이 겹치고 등의 일들이 얼마나 쉽게 왔다갔다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간발의 차로 우린 얼마나 큰 행복과 불행의 차이를 겪게 되는지. 오늘 뜬 음성이 14일 뒤에도 떠야, 비로소 난 안심하게 되겠지만 어쨌든 어제 식사에서 서로 조금은 조심했던 게 음성 판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인생은 왜 이렇게 모르는 걸까. 지난 주말에 4시간 등산하던 내가 앞으로 14일간 방구석에 쳐박혀 엄마가 방문 앞에 놔주는 음식만 먹게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모든 걸 떠나, 모든 걸 지나 우리 모두 건강해야겠다. 건강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특히, 코로나처럼 감염을 일으키는 나쁜 질병 앞에서는, 내 건강이 내 소중한 사람의 건강이 되기에 나부터 건강해야 한다. 언젠가, 코로나와  next 코로나 따위 없는 깨끗한 세상에서 맘편히 웃으며 오늘날을 이야기할 수 있길. “1989년 전도 아니고, 21세기에 해외 여행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더라?” 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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