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 순진한가요
요새 친구들을 만나면 내게 뭐 하고 지내는지 먼저 물어본다. 회사를 다니고 있지 않은 상태를 꽤 오래 유지하고 있으니 궁금할 법도 하다.
사실 여행 전에는 어차피 여행을 앞두고 있었으니 구직을 할 이유도, 필요성도 못 느꼈고 그러니 맘껏 놀러 다녔다.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우고, 가보고 싶은 곳도 가보고. 정말 영원히 백수로 살 수 있겠다 싶은 나날들이 지나고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길을 잃었다. 나 이제 뭐 하지. 시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뽑는 사람 입장에서도 내가 지금 실력이 있는지 회사에 적응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지 내가 3개월을 쉬었는지 12개월을 쉬었는지가 그렇게 중요할까. 그리고 얼마나 쉬었는지보단 뭘 하면서 쉬었는지가 차라리 궁금할 거다. 그럼 뭐가 상관이 있었냐 하면 당연히 현실적인 생계의 문제다. 여행에서 후회 없이 보내고 싶어서 남은 돈을 다 썼다. 그래서 이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전처럼 학원을 다니는 것도 이제 부담이고 (학원비 때문이 아니라 학원 다니는 시간 동안 아르바이트나 직장을 못 다니니) 좋아하던 영화값이나 책값도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만 있는 시간이 너무나 많아진 나는 공허했다.
얼마 전, 친구가 결혼을 해서 친구 집들이를 갔다. 친구의 신혼 이야기를 한창 하다가, 주제가 나의 근황으로 넘어왔다. 한 친구가 말한다. '넌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나라면 통장에 몇 천이 쌓여있어도 불안해서 그렇게 못 쉴 것 같아. 그렇게 도전할 수 있는 네가 정말 대단해.' 라며 나를 칭찬했다. 그 자리에선 사실, 내 퇴사 소식과 그 이유를 들은 누구나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텅 빈 잔고를 가진 나에겐 다른 이야기였나 보다.
드라마에서 흔히 주인공이 창피한 일을 하거나 충격적인 일, 걱정스러운 일이 있으면 자려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는 장면, 누구나 봤을 거다. 딱 그렇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낮에는 그냥 스쳐 지나갔던 말이 갑자기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서, 저 친구는 통장에 몇 천이 있어도 불안할 건데.. 난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내가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르나? 나 이러다 길거리에 나앉는 거 아냐? 가족들에게 돈 빌려달라고 손 벌리고 다니는 거 아니야? 잠이 확 깼다. 숨 막히는 공포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당장 다음 달 생활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까지고 백수로 있다간 손가락 빨고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아르바이트 어플을 오랜만에 다시 열었다. 아르바이트들을 열심히 뒤지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에 지원서를 보내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이제는 남들의 대단하다는 이야기가 칭찬으로 들리지가 않는다. 남들이 안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건가? 나 혼자 너무 태평한가? 차라리 '아직 멀었네 더 쉬어. 나는 더 안 쉬어서 후회된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은 요즘이다. 잠 못 드는 밤이 많다.
2024년 5월 말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