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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즐기는 방법

지하철로 가는 종착역 여행

by 젊은 느티나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가을이 온다.

가만히 집에 앉아 여느 때처럼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있는데 문득,

가을에는, 짧았지만 지겨운 구직 생활을 청산하고 가을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에 취업을 해야겠다, 고 다짐했다.


때마침 지원했던 회사에서 면접 연락이 왔고, 면접을 두 차례 보았다.

성격이 차분한 편이라 주변 사람들은 내게 면접 같은 건 무리 없겠다, 고 말해주곤 했었는데

너무 아쉬운 말만 횡설수설 늘어둔 채, 면접장을 나왔다.

면접에서는 약간의 거짓말도 필요하다. 면접관이 좋아할 것 같은 말,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내 입에선 자꾸 진실만 나왔다. 진정성 있는 말, 이런 게 아니라 면접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입에서 내뱉어진 말들. 말하고 아차 싶은 말들.

이를테면, 이 회사는 오렌지를 가장 좋은 과일이라고 내세우는 회사라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적어도 시트러스 계열까지는 말했어야 하는데 수박을 말한다던지. 하는 대답들. '아, 수박.. 수박 쪽은 잘 모르겠네요.'라는 답변을 듣고 아.. 속으로 탄식했다.


그런데 운 좋게 합격했다. 가을에 집 안에 틀어박혀서 책상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취업시장이 안 좋다는 기사들에 맘 졸이던 불안감이 해소된 것, 물론 좋았지만 가장 좋은 건 이 지난한 구직활동의 늪에서 벗어났다는 것. 고작 두 달 집중한 게 단데, 앞서 놀았던 시간들에도 마음 한편에는 계속 남아있었으니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나 보다. 집에서 야호, 소리를 질렀다.


당장 출근이 아니라 나에게는 약 3주의 시간이 주어졌다. 출근을 시작하면 이렇게 긴 휴가는 다시없을 거다. 물론 백수기간에도 쉴 만큼 쉬었지만 그땐 취업이라는 문제를 마음 한편에 두고 놀러 다녔다면, 이제는 정말 자유로운 마음으로 쉴 수 있는 거다. 여행을 갈까, 무얼 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지하철 종착역 여행>이다.

나는 사실 전부터 지하철이나 버스로 아무 데나 내려서 그곳을 여행한다던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역에 내려서 탐방한다던지 하는 생각을 늘 해왔고, 실제로 친구와 그렇게 놀러 다닌 적도 있었다. 서울에도 내가 가보지 않았던 동네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런데 그걸 하나하나 검색하는 것보다 어차피 종착역에서 내리면 수도권에 가닿지 못한 끝까지 가보는 거니까. 남은 기간은 그렇게 보내기로 결심했다. 긴 지하철 여행을 하다 보면 생각도 정리되고 그러지 않을까? 약간의 걱정은 하루종일은 대중교통 안에서 보내다가 하루가 지나가는 것 아닐까 하는 것과 자리가 없어서 몇 시간을 서서 가면 종착역에 도착해서 뭐 별 것 하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지하철을 타야 하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인데 일단 해보자.


검색해 보니, 수도권의 지하철 노선은 총 24개의 노선이고, 2호선은 순환선이라 종착역이 없으니 나머지는 총 23개의 노선이다. 현시점 기준으로는 출근까지 약 16일이 남았는데 그중, 약속이 있거나 일정이 있는 날도 있으니 대략 12일 정도만 지하철 여행에 사용할 수 있다. 23개의 노선 중, 여행에 적합한 노선을 12개만 꼽아본다. 하나하나 짚어보자.


1호선, 인천, 신창, 연천. 아, 생각해 보니 한 호선 당 적어도 2개의 종착역이 있으니 더 많이 추려야 한다. 나는 단지 지하철을 타고 여행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종착역을 여행하는 게 목적이니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도 필요해서 하루에 두 군데의 종착역은 조금 어렵다. 이럴 땐 내가 하나하나 집에서 얼마나 걸릴지 알아볼 필요가 없다. 나의 동반자 챗GPT에게 물어본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 동네 주민들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는 곳, 관광지가 아닌 곳, 앞으로도 놀러 갈 일이 잘 없을 것 같은 곳.


그에게 물어보고 추천받아서 총 12개의 종착역을 정했다. 사실 챗지피티는 애용하는 도구이긴 하지만 추천에는 약하기 때문에, 우려되는 부분이 있지만. 일단 그가 정해준 12개의 종착역을 내일부터 하나씩 다녀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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